brunch

100-051 텀블러 세척기

건축가의 일상읽기

by 윤소장

스타벅스 텀블러 세척기, 건축가의 시선으로 보다

생일 선물 받은 스타벅스 텀블러가 있었다. 하지만 몇번 쓰고 잘 쓰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세척의 귀찮음 때문이었다. 속이 깊어 솔로 구석구석 닦기 힘들고, 바로 씻지 않으면 냄새도 남았다. “언젠가는 써야지…” 하면서도 늘 집 한쪽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리 동네 스타벅스에서 텀블러 세척기를 발견했다. 컵 전용 세척기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직접 사용해보니 더 놀라웠다. 짧게 세척하는 30초 모드부터 세제 세척과 건조까지 되는 10분 코스까지 준비돼 있었다. 텀블러가 뽀송뽀송하게 돌아왔을 때의 쾌감! 그때부터 아침엔 커피를 사고, 저녁에는 세척기를 이용하는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이건 LG 홍보가 아니다!) 텀블러를 자주 쓰게 만드는 건 결국 편리함이었다.


세척기의 위치, 건축가의 눈으로 본다면

내가 건축가라서 그런지, 기계보다 위치에 먼저 눈이 갔다. 세척기는 매장 구석, 음료 주문대와 컵 리턴 존 사이에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원래부터 있던 설비는 아닌 듯했다. 뒤쪽에 전선과 배관이 얽혀 있었고, 보기 흉하지 않게 금속 박스로 가려둔 흔적도 있었다.


그럼 왜 하필 이 자리였을까?

첫째, 설비 조건 때문이다. 급수와 배수가 필수인 기계라 싱크대와 가까워야 했다.텀블러 세척기 뒤에는 음료를 제조하는 머신과 싱크등의 기능이있는 곳이다.전기 콘센트는 벽에 미리 공급되어있는데, 물이 튀어도 문제가 없게 방우형 덮개로 가려져있다. 정말 단순한 디테일이지만 놓치면 큰 문제가 되는 것이 물과 전기가 만나는 장소이다.

둘째, 동선 때문이다. 손님의 동선을 생각했을 때 주문 전에 세척하거나, 음료를 다 마신 뒤 세척하고 나가기 좋은 자리였다. 그 둘과 가깝지만, 구석진 자리라 몇분을 기다릴때 다른 사람의 동선을 방해하지않는다.

결론적으로 설치 조건인 설비가 가능하고 손님의 주문과 리턴 동선을 동시에 만족시킨 최적의 위치였던 셈이다.

건축과 생활가전, 같은 원리

이 작은 세척기를 보며 건축가로서 떠올린 게 있다. 가전제품은 결국 설치 위치가 성패를 좌우한다는 점이다. 식기세척기, 빌트인 오븐, LG 스타일러 같은 생활가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사도, 전기·급수·배수 조건을 고려하지 않으면 설치 자체가 어렵다. 드레스룸에 두면 좋은 스타일러를 거실에 억지로 두는 경우처럼 말이다.

좋은 건축은 단순히 벽에 고급 페인트를 칠하고 유럽산 스위치를 쓰는것이 아니다. 요즘은 가전제품을 반려가전이라 하지 않던가. 그 덩치큰 가전들을 반려자로서 같이 잘 지내려면 삶을 설계한다는 말은 앞으로 들어올 기계와 사람의 생활 동선까지 함께 설계하는 일이다.


스타벅스 텀블러 세척기라는 작은 편리함 앞에서 여러가지 얽히고 섥힌 공간배치의 정석을 다시 복기하게 되었다. 10분의 세척시간동안 글감을 얻은 것은 덤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첫 독자 pen 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