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싶은 이불이 생겼다. 그런데 무척 비싸다. 백만 원쯤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백만 원보다는 이백만 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백만 원도 충분히 분에 겨운데 이백만 원은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훗날 돈을 아주 잘 번다면, 빚도 갚고 더 필요한 데에다가 다 쓴 뒤로도 여유가 있다면 그때 다시 고민해 보기로 한다.
올해는 더위도 그렇더니 추위도 늦다. 여름 더위를 겪어보니 추위 역시 늦다고 덜 할 거란 보장이 없어 더 늦기 전에 방한 준비에 돌입한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던 보일러도 켜고 이불도 바꾸는데 이게 웬걸, 보일러도 문제고, 이불도 문제다. 보일러 온도를 아무리 높여도 방의 일부가 따뜻해지지 않는다. 작년에는 온수매트를 수리했는데 올해에는 보일러를 고치거나 바꿔야 하는 걸까. 서둘러 수리 신청을 해 보았더니 서비스센터에서 하는 말이 보일러가 아닌 보일러 온도 조절기 문제란다. 온도조절기 회사 고객센터 연락처는 도저히 알 길이 없어 문의를 위해 아파트 관리실에 들렀더니 다행히 비슷한 문제를 겪는 집이 몇 집 더 있었다며 소장님이 직접 방문하여 바로 수리해 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이불. 겨울과 여름을 제외한 다른 계절에는 얇은 구스 이불을 남편 하나, 아이와 내가 하나씩 덮고 지내는데 날씨가 추워지면 남편에게 두 장을 다 몰아준다. 오로지 이불의 온기에 의지해 자는 것을 선호하는 남편은 온수매트를 사용하는 우리 모녀보다 보온이 잘 되는 이불이 필요해서 겨울이면 매번 구스 이불 두 장을 합쳐 혼자 사용하고 있다. 아이와 나는 십 년 전 구매한 극세사 이불을 겨울마다 덮는 중인데 워낙 크고 두껍다 보니 세탁이 어렵고 한 번 빨 때마다 묘하게 얇아져서 작년부터 새 이불을 눈여겨보던 참이었다.
그런데 갖고 싶은 이불이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싸니 난감하다. 좋은 이불을 하나 사 놓으면 두고두고 쓸 수 있고 난방비도 줄어든다는 이점이 있지만 요즘처럼 긴축을 목표로 하는 시기에 이백만 원이라는 금액은 도무지 수지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발견한 양털 이불이 십만 원 후반대 금액인데 행사 기간에 사면 십만 원 중반대에도 살 수 있다고 한다. 원하던 양털 이불에 비하면 뒷자리 0 하나가 사라질 정도로 금액 차이가 많이 난다. 가격에 이렇게나 큰 차이가 있는 걸 보면 양털 질도 분명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그래도 솔깃하다. 명세서를 확인해 보니 이번 달 목표 금액을 넘길 게 뻔하지만 그렇다고 작정하고 더 쓸 수는 없으니 이미 질러버린 결제액 중에 무언가를 취소하기로 한다.
무엇을 취소할 수 있을까. 결제 내역을 아주 꼼꼼하게 하나씩 노려본다. 이미 사용 중이거나 먹어 버린 것은 당연히 안되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바로 공연이다. 12월부터 1월까지 예매해 놓은 공연은 총 세 편으로, 하나는 아이돌 멤버 한 명이 여는 솔로 콘서트, 하나는 아이와 함께 볼 발레 공연, 그리고 나머지는 또 다른 아이돌 멤버가 등장하는 뮤지컬 공연이다. 아이와 한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으니 결국에는 덕질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둘 다 수수료를 지불하며 몇 번의 취소와 예매를 반복해 겨우 얻은 앞자리라 아깝기는 매 한 가지다. 그래도 또다시 무겁고 세탁도 어려운 극세사 이불을 덮을 것인가, 아니면 공연을 포기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보니 답이 나왔다. 아무리 덕질이 중요하다 해도 편안한 잠자리보다 중요하다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취소했다. 입덕 멤버의 솔로 콘서트를.
며칠 뒤 기다리던 이불이 도착했고 포장을 뜯기에 앞서 기대보다는 불안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콘서트보다 가치가 없는 이불이면 어떡하지. 이제와 콘서트 자리를 구할 수도 없을 테니 이불은 무조건 괜찮아야 한다. 구스에 비하면 훨씬 무게감이 있고 겉면은 면 100% 라기엔 바스락 거림이 심하지만 자꾸 쓰다 보면 소리에는 익숙해질 거라며 다독인다. 가볍고 따뜻한 데다 세탁도 용이하여 몇 년 전부터 탐을 냈던 양털 이불에 비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 결국 건조기에 넣어 먼지를 털어내고 집에 있던 커버를 씌운 다음 이부자리에 깔았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운 아이는 왜 이렇게 무거운 이불을 샀냐며 타박했지만 사진만 보고 주문한 난들 이럴 줄 알았나.
이불과 티켓을 맞바꾸고 한 달이 지나자 콘서트 날이 다가왔다. 아쉬움에 눈물 지을 줄 알았더니 정작 공연이 다가올 쯤에는 나라에 비상이 걸려 덕질이고 뭐고 손에 잡히질 않았다. 하필 공연이 끝나면 바로 국회위원의 탄핵 표결 이 진행될 시각이라 표가 있어도 마음 편히 즐기기 어려웠을 것 같다. 표결 당일 근소한 차이긴 했지만 가결로 마무리됐고 가수의 라이브 공연을 볼 때와는 또 다른 격한 감정을 느꼈다. 아이는 뉴스를 보고 우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왜 기쁜데 눈물을 흘리냐' 물었지만, 글쎄. 왜 눈물이 흐르는지는 몰라도 마음 어디선가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한 달 동안 사용해 본 이불은 처음 가졌던 우려 해 비하면 잘 쓰는 중이다. 바스락 소리는 실제로 줄어든 건지 귀가 적응한 것인지 몰라도 이제 거슬리지 않고, 빳빳하게 떠있어 무게감으로 따스함을 느껴야 했던 초기와 달리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져서 불편함 없이 덮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덕질을 포기하고 선택한 이불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 온수매트를 틀지 않아도 따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온도를 예전만큼 높일 필요는 없다. 그래서 원래 갖고 싶었던 이불은 이제 포기했냐고? 내가 아주 돈을 많이 벌거나 모아서 이불을 살 형편이 될 만한 시기가 진짜 찾아온다면 그쯤에는 지금 덮는 이불도 많이 낡지 않았을까. 그때의 사치는 그때의 내가 결정해 보는 걸로! 일단은 공연 대신 들인 양털 이불로 올 겨울은 따뜻하게 지낼테니 한 시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