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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Jul 05. 2024

'모카커피'가 재입고되었습니다.


먹던 커피가 다 떨어졌다는 이유로 집에 있던 디카페인 커피를 마셨더니 수면 질이 좋아졌다. 모닝콜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떠 ‘아, 개운해!’하며 마음속으로 외치는 기분은 살면서 몇 년 해 보지 못한 경험이라 중독될 정도다.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매일 이렇게 꿈을 덜 꾸며 푹 잠자고 상쾌하게 깨어나고 싶어서 술과 커피를 멀리해 보려던 참인데 계속해서 품절이었던 커피가 때마침 들어왔다는 알람이 떴다. 언제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지 않았을 커피를 지금이 아니면 또 못 살 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에 결국 사버렸다. 어찌 보면 ‘품절’보다 두려운 것이 ‘재입고 알림’이다.




식사 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찬장을 여니 요 며칠 먹던 디카페인 커피와 함께 새로 산 모카커피가 나란히 놓여 있다. 뭘 마실지 고민하다 사놓고 안 먹을 수는 없으니 새로 산 것을 따버렸다. 오늘 밤에도 숙면을 취하고 싶지만 우유에 타 마시면 더 맛있는 모카커피 역시 마시고 싶다. 어쩔 수 없이 두 마음을 절충하여 새로 산 커피 한 스푼, 디카페인 한 스푼을 밀크팬에 넣고 끓인다. 설탕은 크게 한 스푼 떠서 잔에 붓고, 자작하게 물을 부어 금방 끓기 시작하는 밀크팬 안으로는 우유를 듬뿍 붓는다. 밀크팬 안에서 서서히 데워지고 있는 우유 테두리에서 동그란 거품이 일기 시작하면 불을 끄고 설탕이 담긴 잔에 부드럽게 부어주는 걸로 인스턴트 모카라테가 완성된다. 수저로 설탕이 잘 섞여 녹아들도록 서서히 저어준 후 바로 호로록 마시면 좋겠지만 일단 티코스터 위에 옮긴 채로 잠시 식힌다. 그러는 편이 더 맛있어서 라기보다는 원래 뜨거운 걸 잘 못 마셔서 그렇다.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사람을 ‘고양이 혀’라고 부르던데 우리나라는 뜨거운 걸 먹으며 ‘시원하다’고 표현하는 민족이라 그런지 나처럼 뜨거운 것에 약한 사람에게 굳이 귀여운 별칭을 붙여주는 대신 나약한 인간으로 보는 일이 허다한 것 같다.

아차, 커피 이야기에서 갑자기 딴 길로 새 버렸다. 아무튼 뜨거움이 한 김 빠진 커피를 조심스럽게 마셔보니 모카 향이 부드럽게 올라오는  것이 지극히 잘 아는 맛있는 맛이다. 입술을 따듯하게 적신 커피는 혀를 지나 입 안으로 퍼지더니 이윽고 식도를 타고 흘러내린다. 실제로 눈을 감으며 음미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품절로 한동안 먹지 못하던 커피를 오랜만에 마시는 기분은 마치 반짝이는 빛이 떠다니는 사이로 눈을 감고 턱을 든 채 ‘미미(美味)’를 만끽 중인 만화 속 인물이 된 듯하다. 쇼츠 영상 속 귀에 박히는 음악처럼 도파민이 자극되며 순간적으로 중독을 일으키는 맛이라기보다는 옛날 ‘가요톱텐’에서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서서히 무대 위에서 퍼져나가는 동안 흘러나오던 부드럽고 잔잔한 발라드 음악처럼 느리고 차분하게 분위기를 몰아가는 맛에 가깝다. 모카향이 나는 따뜻하고 달달한 라테는 매일 첫 식사 후 갖는 단순한 습관이라기보다는 책상 앞에서 무언가에 몰입하기 전에 필요한 은은한 빌드업이자 소소한 만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인스턴트커피 한 잔 가지고 너무 호들갑 떠는 게 아닌가 싶지만 마침 똑 떨어진 커피를 다시 구매하기 위해 쇼핑 애플리케이션을 켰다가 ‘현재 품절’이라는 문구를 봤을 때의 절망감을, 다른 사이트에서도 대체로 품절이거나 세 배가 넘는 금액을 지불해야만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났을 때의 황당함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이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머나먼 나라에서 귀하게 자라 구하기 어려운 고급 원두였다면, 커피 맛이 좋기로 유명하여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먼 거리를 가야 하거나 긴 시간을 대기해야 하는 곳의 커피였다면 또 느낌이 달랐을 것이다. 아주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특별한 것이라면 으레 흔히 못 먹고 못 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보니 어쩌다 한 번 구하거나 마시는 것을 행운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스턴트커피다. 아무리 수입 커피라 하더라도 온라인에서도, 오프라인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가성비 좋고 손쉽게 구할 수 있어서 마시는 게 인스턴트커피 아닌가.

인스턴트커피라면 집 앞 마트나 편의점에만 가도 흔히 구할 수 있을 텐데 굳이 ‘그’ 모카커피를 마셔야 할 필요가 있을지 궁금할 수 있겠다. 나 역시도 그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품절된 상태로 한동안은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집에 있던 아무 인스턴트커피로 라테를 만들어 먹었을 때, 그저 쓰기만 하고 텁텁한 맛에 실망해 버린 기억을 쉽게 잊을 수가 없다. 예전에 먹었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모카커피를 마신 후로 내 혀가 까다로워진 탓이다. 아까부터 모카커피, 모키커피 하는데 이것은 그냥 모카커피가 아니다. 나도 마시기 전에는 뭐 크게 다를까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구매 후 리뷰에서 알려준 것처럼 우유에 타 라테를 만든 후 잔 가까이로 코를 가져다 대니 이것은 익숙한 인스턴트커피 향이 아닌 균형 잡힌 모카커피 향에 가까웠다. 모르고 마셨다면 분명 좋은 커피라 믿을 정도였다. 인스턴트커피로도 이런 퀄리티를 낼 수 있다는 점이 매우 놀라웠다. 인스턴트커피는 커피가 아니라 말하는 분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심지어 믹스커피 소비자 사이에도 선호하는 맛과 브랜드라는 것이 있다. 고작 믹스커피지만 나름의 사치라 여겨지는 제품군이 있다는 거다. 그런 면에서 이 모카커피는 제법 사치품이다. 가격도 다른 인스턴트커피의 두, 세 배는 비싸고, 구입하는 것도 때에 따라 어려운 데다, 맛과 향도 원두 관리가 잘 안 되는 카페에서 마시는 숯맛 나는 커피에 비하면 훨씬 고급지다. ‘고급스럽다’라는 말만큼 고급스럽지 않은 말이 없지만 이 모카커피는 값에 비해 제법 균형 잡히고 자연스러운 맛과 향을 낸다. 그냥 인스턴트커피라고 깔보기에는 얻을 수 있는 만족이 크다는 말이다.

내가 오, 육 성급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희귀한 원두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인기 있는 카페를 매일 같이 찾아다니겠다는 것도 아닌데 집에서 특정 인스턴트커피만 먹겠다고 우기는 것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닐까. 내가 이 커피를 그만 마시게 된다면 그것은 숙면을 취하고 싶어서이지 적어도 돈 때문은 아닐 것 같다. 조금 더 비싸고, 조금 더 구하기 어려워도 그래도 고작 인스턴트 커피인데 이것 한 잔도 편히 마시지 못한다면 그건 진짜 비상사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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