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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떡국 먹어도 한 살 안 먹는다고요?

by 으네제인장


올해도 어김없이 1월 1일에 일어나 첫 끼니로 떡국을 먹으며 ‘떡국 먹었으니 한 살 더 먹었다’ 고 말했다. 이 말의 시작은 대체 어디였을까.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새해 첫날 대가족이 모여 앉아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떡국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안 먹겠다고 울면서 버티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다른 메뉴를 준비해 줄 수도 있겠지만 옛날이라면 새해라고 특별히 준비한 것이 떡국일 수도 있다. 음식 귀한 줄 모른다며 엄하게 훈계한 후 억지로 먹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러는 대신 집안 어른 중 한 명이 ‘떡국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먹는다’고 말하며 아이를 타이르기 시작하던 것이 지금까지도 관용구처럼 이어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떡국의 역사와 배경을 조금만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그러는 대신 상상 속 장면에 머물기로 한다.

어릴 적 주변에서는 이런 경우도 있었다. 빨리 어른이 되기 위해 떡국을 여러 그릇 먹겠다고 고집 피우는 경우다. 나는 되도록 늦게 자라고 싶은 편이라 새해 떡국은 언제나 피하고 싶은 메뉴였다. 떡국을 안 먹는다고 나이를 안 먹는 것도 아닌데 새해만 되면 왜 그리 먹기가 싫던지. 그렇기에 떡국을 먹을 때면 따라오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새해 첫날 떡국을 먹으며 이미 한 살을 먹었음에도 설날 아침이면 또 먹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어느 쪽 떡국이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하는 쪽인가’ 하고 궁금해지는 것이다. 참지 못하고

“이거 먹으면 또 한 살 먹는 거 아니에요?”

라고 물으면 어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때 먹은 떡국은 가짜고 오늘 먹는 게 진짜야”


'그게 뭐야.'하고 입을 삐죽거렸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원래 양력보다 음력 새해를 더 중요시 여겼으니 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설 명절을 누리지 못했고 지금처럼 설날이 연휴가 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의 일이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양력 새해를 챙긴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 강제로 빼앗겼던 명절을 되찾은 느낌이라 지금까지도 음력설을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이 아닐까.


우리 집 어린이는 떡국과 나이 관계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그저 떡국을 좋아해서 일 년 중 몇 번이든 기쁘게 받아먹는다. 나도 어른이 된 후로는 꽤 좋아하게 됐지만 아이나 남편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 결혼 초에는 마치 정석처럼 소고기가 들어간 떡국을 끓였는데 남편이 물에 빠진 육고기를 싫어하는 탓에 공들여 끓여놓고도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 조미료만 넣고 끓여줬는데 남편이 그걸 너무나 맛있게 먹는 게 아닌가. 그런 모습이 굉장히 얄미웠지만 타인의 식성을 두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으니 남편이 먹는 떡국은 언제나 간소하게 조미료만 넣고 만들었다. 조미료가 몸에 크게 나쁘지 않다고 하지만 아이가 떡국을 먹기 시작하면서 다시 레시피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에는 나름 나만의 레시피가 생겨서 연말부터 지금까지는 내내 이 방법으로만 끓이는 중이다.


우선 떡은 물에 불려두고, 냄비에 물과 육수 팩을 넣어 우려내는 동안 새우와 관자를 꺼내 흐르는 물에 씻는다. 그다음 석쇠 위에 올린 채로 직화에 구워주는데 완전히 익히기보다는 겉면에 불향을 입힌다는 느낌으로 구워준다. 토치를 사용해도 되지만 우리 집은 가스레인지를 쓰기 때문에 석쇠에 올린 채로 굽는 재미를 굳이 피하지 않는다. 불향이 올라온 재료를 팔팔 끓고 있는 육수에 넣고 불린 떡을 넣고 마저 끓이는데 보통은 넣지 않는 재료를 하나 더 추가한다. 바로 말린 파다. 떡국에 별다른 채소가 안 들어가는 경우도 많지만 나는 국물 맛을 위해 말린 파가 있을 때면 되도록 넣으려고 한다. 생 대파를 썰어 넣을 경우 미끄덩 거리는 식감이 거슬릴 수도 있는데 한 번 건조된 파는 끓는 물에 넣어도 오도독 거리며 씹히기 때문에 부드러운 떡과 상반되는 식감을 즐길 수 있다. 간이 싱거울 때는 간수가 빠져 단맛이 살짝 올라오는 굵은소금을 넣거나 그걸로도 모자랄 때는 코인 육수를 넣는다.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추가하는 것으로 완성. 달걀지단을 포함한 다른 지단은 넣지 않고 나는 내 그릇에만 곱게 빻은 깨소금을 추가한다. 남편은 김가루를 올리는 걸 좋아해 본인이 원하는 만큼 넣어 먹고, 아이는 아무것도 올리지 않은 걸 가장 선호하기 때문에 떡국 하나를 만들어 제각각 입맛에 맞춰서 먹는다.

설 당일에는 주로 본가에 가서 식사를 한다. 올해 설 떡국 역시 부모님 집에서 먹었다. 부모님은 굴 떡국을 좋아하지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우리가 갈 때는 주로 다른 방식으로 끓인 떡국을 먹는다. 올해에는 특별히 노란 떡국. 주로 뽀얀 국물만 보다가 노랗게 물든 떡국을 보니 색다르다. 맛은 또 어떻고. 이번 떡국의 특별 재료는 바로 성게였다. 성게 알을 넣어 만든 떡국이라니. 이런 떡국이라면 한 살 먹는다고 해도 대환영이다. 아이가 먹을 것은 미리 덜어 놓고 어른들이 먹을 것에만 성게를 넣어 모두가 만족하는 한 끼 식사였다.

몇 해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우리나라식 나이와 만 나이라는 것이 공존했다. 이제는 만 나이로 통합하기로 했지만 나이를 묻는 상황에서는 여전히 혼란이 일어난다. 누군가는 변함없이 날 때부터 한 살이라고 치던 셈법으로 나이를 말하고 누군가는 만 나이를 이야기한다. 그 정도면 다행인데 어떤 이는 헷갈린다며 아예 엉뚱한 숫자를 말하기도 하고 차라리 알기 쉽게 태어난 년도를 묻기도 한다. 이 정도는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나지만 칠순이나 팔순처럼 큰 행사를 앞두고서는 가족회의가 열리기도 한다. 환갑은 만 나이로 계산하지만 칠순부터는 아니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서 어느 쪽에 맞춰야 할지 곤욕이기도 하다.

만 나이로 통합되어 반가워하는 사람도, 헷갈린다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떡국을 보면서 아쉬움을 가장 많이 느낀다. 더 이상 새해 떡국을 먹으며 나이를 먹는다는 이야기는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사라지는 말이나 존재가 어디 한, 두 개 인가. 그렇지만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먹는다'는 말은 과학적 근거도 없고 엉뚱하여 더 재미가 있다. 언젠가 떡국을 앞에 두고 한 살을 먹었다느니, 두 살을 먹었다느니 하는 농담도 사라지겠구나 생각하면 그것이 좀 씁쓸하다. 나이 먹기 싫어서 새해 떡국도 마다하던 어린이가 이제는 새해 떡국 농담이 사라질 것을 아쉬워하는 어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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