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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Jun 13. 2020

다시 #1. 다시, 함께 걸을 수 있을까.

불친절한 에필로그 혹은 친절한 프롤로그




J. M. W. Turner, Norham Castle, Sunrise, 1845, Tate Britain, London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3개월 전, 3월 13일이었다. 그 3개월보다 훨씬 전부터 나는 꽤 오랫동안 제목에 대해 고민했다. 제목을 51번째로 할지 첫 번째로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고민 끝에 나는 다시#1이라고 제목을 짓고 글을 써 내려갔다. 그때 나는 착각했다. 내가 터너(J. M. W. Turner)의 그림 <노엄 성, 해돋이 Norham Castle, Sunrise >에 그려진 해가 떠오르는 그 순간처럼, 내가 그렇게 눈부신 처음을 앞두고 있다고 말이다. 참으로 대단한 착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3개월 전에 글을 쓴 대로 되기는 했다.

이 글은 여러 가지 의미로 첫 번째 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50개의 글이 주는 부담감에 3개월이 지난 뒤에 쓰는 첫 번째 글이다.

(늘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너무 늦게 와 죄송함과 감사함을 전합니다.

혹시라도 기다려주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더 죄송하고 더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이 글은 짧고도 격동적인 그 3개월을 보내면서 달라진 각오로 쓰는 첫 번째 글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이 글에 맞는 마음이 되었다.


          

같이 혹은 함께, 그 미묘한 차이


처음 이 글을 시작하며, 에필로그인지 프롤로그인지 알 수 없는 이 글의 제목을 “같이 걸을까”로 하기로 했다. 그 마지막에 마침표를 찍을지, 물음표를 둘지, 줄임표를 할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같이 걸을까”로 해둘 참이었다. 그러던 중에 알아차렸다. 브런치 매거진의 제목이 “같이 걸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함께 걸을 수 있을까”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같이 걸을까”라고 했을 때는 그렇게나 고민이 되어서 그 어떤 것도 덧붙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함께 걸을 수 있을까”로 하고서는 너무나 쉽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같이: 둘 이상의 사물이나 사람이 함께

함께: 한꺼번에 같이. 또는 서로 더불어     


사전상 둘의 의미는 매우 미묘하게 다르고 상당 부분이 중복된다. 

같이의 뜻을 풀이하면 둘 이상의 사물이나 사람이 “한꺼번에 같이, 또는 서로 더불어”

함께의 뜻을 풀이하면, 한꺼번에, “둘 이상의 사물이나 사람이 함께.” 또는 서로 더불어     


같이와 함께의 사전상 의미를 풀어쓴 때, 같이 혹은 함께라는 단어 없이는 쓸 수 없다. 쓰려고 해 보면 도돌이표 같은 느낌이다. 그저 굳이 고른다면 “함께”로 하고 싶었다.          




William Turner, Snow Storm, or Snow Storm: Steam-Boat off a Harbour's Mouth, 1842, Tate, London



반복되는 불행과 다행의 사이


작년 여름 매거진을 시작하며 첫 번째 글을 썼을 때 나는 위기였다. 기회는 위기의 가면을 쓰고 온다고들 하는데 당시는 그런 류의 위기가 아니었다. 그때 내가 마주한 위기는 알고 보니 터너의 그림 <눈보라 Snow Storm>보다 더한 눈보라였다. 터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눈보라 속에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저 눈을 떠보니 눈보라 치는 바다 한가운데였을 뿐이었다. 터너가 눈보라를 지나 이 그림을 남겼듯이 나도 눈보라를 지나 어떤 작품을 남길 수 있을까...

     

매거진을 시작하기 훨씬 전인 2018년 겨울 즈음, 나는 생각만큼 일이 풀리지 않았다. 아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 말이 가장 맞다. 그리고 바로 그때 결혼 상대로 매우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그를 만났다. 적당한 그를 만나기로 한 결정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나는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서,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확신이 없던 불안감에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그와 헤어졌다. 더 큰 불행은 그와의 헤어짐과 별개로 나는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현실적인 삶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나로 인해 내 가족의 희생과 기다림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다시,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2019년까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일을 완전히 그만두기로 했다. 그때 내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반년 남짓한 시간이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또다시,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나는 알았다. 일을 하는 동안 내가 가장 빛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착각이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일에 있어서 나는 남들보다 뒤처지지는 않았다. 내 작업물을 훔쳐가는 사람들은 나를 고통스럽게 했으나 내게 위안도 주었다. 내가 적어도 누군가 훔치고 싶은 작업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다시, 함께 걸을 수 있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그 작년 6월 즈음에 노래 한 곡을 들었다. 이적의 <같이 걸을까>였다.      


피곤하면 잠깐 쉬어가 갈 길은 아직 머니까 

물이라도 한잔 마실까 우린 이미 오래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니까

높은 산을 오르고 거친 강을 건너고 깊은 골짜기를 넘어서 

생의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오늘도

...(하략)...     


덕분에 한동안 방치된 매거진의 글을 쓰기로 하면서 제목을 정할 수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나는, 같이 대신 함께를 제목으로 썼다. 다만 분명히 기억나는 감정이 있다. 나는 그때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어서, “걸을까” 대신에 “걸을 수 있을까”라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썼었다. 


나는 첫 번째 글을 시작했다. 첫 번째 글을 시작하며 나는 함께 걷고 싶은 마음을 담아 “함께 걸을 수 있을까”라고 했다. 그때 나는 100번째 글에서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그럴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러지 못했다. 

나는 50번째 글에서야 겨우 당신이 사람이 아닌 일임을 말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또다시 50번째 글, 그러니까 100번째 글에서는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때, 내가 사랑한 그 일과 함께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처음, 그리고 다시 처음.  


3개월 전의 나는 다시 처음이고 싶은 마음으로 글의 제목을 #51이 아닌 다시#1로 했다.

그때 내게는 처음을 기대하며 설렘과 기대가 더 많았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나는 처음을 기대했다. 나는 또 다른 처음이 터너의 그림 속 해돋이와 같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3개월이 지난 오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그때와 전혀 다른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3개월 전의 나는 해를 맞기 위해 깊은 밤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 나는 잊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마주한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나는 터너의 다른 그림 속 눈보라보다 더 두려운 현실에 있다. 다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제 두려움보다 더 큰 전투력이 있다.     


지금도 나는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원한다, 그토록 어렸던 처음보다 훨씬 더 절실한 마음으로. 

내가 언제나 원했던 사랑하는 당신인 일과 함께 나란히 걷기를.

반년이 지난 뒤에는, 내가 이 일에 있어서 가장 독보적인 단 한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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