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가끔씩 생각나는 그 날 만난 당신께 뒤늦게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아마 이즈음이었을 겁니다. 대학원에 다니던 저는 며칠 밤을 새우고도 결론을 짓지 못한 과제 탓에 결국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를 타서 학교 이름을 말한 채 노트북을 열어 미처 다하지 못한 과제를 겨우 마무리 지었습니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글씨를 볼 때면 나타나곤 하는 멀미도 그 순간만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노트북을 닫아 가방에 넣자마자 갑자기 멀미가 나는 듯 했으니까요. 그래서 기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창문을 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님이 제게 대학생이에요? 라고 물으셨습니다. 순간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인데도 대학원생이 아닌 대학생으로, 어린 학생으로 봐주시는 게 그렇게도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원생이라고 답을 드리니 전공을 물으시더군요. 인문학을 전공한다고 하니 힘든 공부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본인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에 남은 당신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택시 기사일을 하기 전에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대학원을 다녔는데 전공은 생물이었다. 처음부터 학원에서 일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대학교에서 자리잡기가 쉽지 않다보니 학원일을 병행했다. 그리고 벌이가 도움이 되자 학원일을 하며 공부를 손에서 놓았고 결국 대학과는 멀어졌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연 끝에 택시기사일을 하게 되었다."
이야기의 끝에 당신이 덧붙였습니다.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포기한 게 미련이 남아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서 돌아갈 수 없었다. 학생이 하는 인문학은 어쩌면 나보다 어렵겠지만 나처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그날 내게서 젊은 시절 당신을 채웠던 그 위태로움을 보았던 건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예상했을 겁니다. 만약 내가 그 길을 포기해버린다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당신보다 더 후회할 것을요.
윌리엄 메릿 체이스 William Merritt Chase, Mrs. Chase in Prospect Park,1886, 캔버스에 유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때 저는 당신의 생각보다 더 위태롭고 위험했을 겁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로 남을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윌리엄메릿체이스의 그림 속 주인공처럼 어디로도 흘러가지 못하는 배를 타고선 그저 고민만 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다른 무엇도 아닌 너무나 쉽게 사라진 제 절실함 탓에, 공부를 포기해야할지 매일 같이 고민했었습니다.
그 날 당신께서 해주신 그 말씀은 정확히 기억나지않습니다. 다만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오던 그 바람, 학교로 향하던 그 넓은 대로의 어느 한 가운데, 그저 스쳐지나는 바람 같은 인연에게 당신이 격려를 건넨 순간, 그리고 울컥해져버린 내 마음, 택시에서 내리고서도 쉽게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 그런 것들이 희미하게나마 생각납니다.
힘들 때마다 그 날의 그 순간을 되새겨보며 하루를 견디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사는 게 힘들어 어느샌가 잊어져버린 그 날의 그 공기가, 문득 불어오는 낯익은 바람에 이렇게 생각납니다.
프랭크 웨스턴 벤슨 Frank Weston Benson, Sunlight, 1909, 캔버스에 유채, 인디애나폴리스 미술관
모두가 그만두라고 말하던 그 때에,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계속 하라며, 내가 가장 절실하게 듣고 싶은 말한
마디를 해준 유일한 단 한 사람.
당신은 내게 신이 보낸 선물이 아니었을까요.
덕분에 저는 오랜 공부를 마치고 제가 꿈꾸던 길을 가고 있으니까요. 아마도 지금 제 모습은 배 아래만 보던 그 때와 다를 겁니다. 지금 제 모습은, 눈부신 빛을 마주보며 하루하루를 기대하는 듯이 보이는 프랭크 웨스턴 벤슨의 그림 속 주인공에 더 가까울 겁니다.
너무 늦게나마 당신께 감사를 전합니다.
당신의 그 말 한마디가 있었기에 나는 그 시간을 지나 지금 여기 이 곳에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당신께 행복이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