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학년 1반 2번 수현이에게
처음이라 두렵나 보다. 다람쥐 차(유치원 버스 문쪽에 있는 다람쥐 그림 때문에 다람쥐 차라 부름) 타고 가는 게 너무 좋다며 아침마다 신나 했던 딸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서는 무엇 때문인지 모를 스트레스 때문에 종종 눈물을 흘렸다. 그 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아빠... 나 학교 안 가면 안 돼?”라고 물을 때 아빠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나도 그랬었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과는 다른 압박이 있는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더 어렸을 때는 두렵지 않던 새로운 시작 이건만 제대로 또박또박 말할 수 있고, 가끔 엄마 아빠를 혼내기도 하는 여덟 살이 된 지금은 외려 두려워한다.
새로운 시작.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하는 것이 두려운 것은 어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늘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산다. 아침에 출근할 때 두 눈은 너무 무겁다. 일터까지 향하는 동안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고 익숙한 내 자리로 향한다. 9 to 6의 삶을 살면서 어쩌다 갖게 되는 회식이 즐겁지만, 술은 마시기 싫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워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가고, 외식을 하기도 한다. 힘들지만 이런 안정감이 오래오래 계속되길 바란다.
나는 열심히 인생을 살았을 뿐인데, 새파란 후배들에게 꼰대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눈치를 봐야 한다. 나보다 별로 잘나지도 않았고, 평판도 좋지 않은 사람이 윗사람이 되어 버린 어이없는 현실이 펼쳐지기도 한다.
직장인이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3년 차, 5년 차, 10년 차의 권태를 가까스로 이겨냈는데, 갑작스러운 비루함이 마음을 흔든다.
'나가자, 더 이상 늦추면 미래는 없다. 나도 사장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 지금 아니면 못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할 때마다 마음을 굳게 먹어보지만, 세면대 거울에는 나만 믿고 사는 식솔들과 갈수록 주름이 늘어가는 노부모의 얼굴이 둥실하니 떠오른다.
'아이템도, 창업자금도 없지 않은가. 그래 내가 뭐라고. 다들 그렇게 산다는 위안으로 넥타이를 매고 쳇바퀴에 오른다.'
결심만큼 포기도 빠르다. 아빠들도 두렵다. 새로운 시작이. 리스크가 없이는 반전이 없음을 알면서도, 너와 함께 살아가야 할 삶 전체가 흔들리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렵다.
일을 마치고, 딸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있어 가봐야 한다며 서둘러 동료들과 인사한다. 아침에 조금 더 일찍 준비해서 정장을 입고 나올 것을 내가 왜 청바지를 입고 나왔을까 후회하며 차에 오른다. 새로운 출발을 응원한다는 플래카드가 적혀 있는 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강당에 오르니 저쪽 앞에 1학년 1반 2번이 된 딸이 보인다. 딸은 평상시의 차분함을 찾았는지 앉아 있는 모습이 의젓해 보인다.
왼쪽 가슴에 흰 손수건을 달고 있는 아이는 한 명도 없다. 우리 때는 한 반에 50명이 넘었고, 10개 이상의 반이 있었는데 강당에 모인 신입생이 겨우 여든일곱 명이다. 한 반에 스무 명이 조금 넘는 정도니 사망인구보다 출생인구가 적어지고,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담임선생님이 소개되는데, 선생님이 참 좋아 보여 다행이다. 눈이 크고 겁이 많은 딸이라 다정한 선생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맨 뒷줄에 딸과 유치원을 같이 다녔던 남자아이 둘이 보인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가족이 식사를 하다 보면 딸은 유치원에서, 학원에서,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참새처럼 지저귀곤 한다. 그 재미난 얘기에 대부분 악역으로 등장하는 바로 그 녀석들이다.
교장 선생님 말씀 중에도 자리에 가만있지 못하고 몸을 베베 꼬고, 의자 위로 벌러덩 몸을 제쳐 드러눕기까지 하는 녀석들을 보며 웃다가 식이 끝나면 "너네 우리 딸 괴롭히면 혼날 줄 알아!" 최대한 무서운 표정으로 경고해줘야 할 것 같다.
쟤들 때문에 우리 딸이 스트레스받은 거라는 생각에 부아가 올라왔다가, 하긴... 남자아이들이란! 하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것은 두렵다. 사람도 일도 모두 낯설다.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라 예측이 되질 않는다. 짙은 안갯속에 비상등을 켜고 운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른도 두렵다. 하물며 야리야리한 우리 딸이야 오죽하겠는가. 엄마는 옆에서 딸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대단하다.
딸이 걷기 시작한 게 다른 애들에 비해 늦었을 때도, 말이 늦어졌을 때도, 때가 됐는데 이가 흔들리지 않을 때도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딸은 조금 늦었지만 잘 해냈고, 지금 아랫니도 흔들거린다. 딸은 지금 우리 부부의 걱정과는 달리 잘 해낼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해맑게 웃으며 축하 꽃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에서 별의별 생각들이 넘나 든다. 그래~! 아빠, 엄마는 밝게 웃으며 딸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고 격려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 모인 아빠들도 먼 훗날 언젠가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것이다. 익숙한 것들과 작별하고 새로운 것을 마주하는 것에 즐거워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른 쳇바퀴의 삶을 돌리게 될 때, 바퀴가 너무 빡빡하게 조여져 있지 않기를 바란다. 바퀴를 굴리느라 힘이 다 소진되지 않도록 말이다.
까치발을 디딘 채 군중을 뚫고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아빠들에게 연대의 정을 담아 외쳐본다.
아빠들아 우리 힘내자! 그리고, 딸아 초등학교 생활도 정말 재밌을 거야. 아빠가 약속한다. 딸도 힘내자~!
딸의 입학을 축하하며.
아빠가 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