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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아래 꽃 한 송이

병원으로 가는 길목, 담장 아래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아스팔트 사이. 어떻게 피어났을지 모를 생명 하나가 거친 땅을 뚫고 나왔다.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가느다란 가지에 쭈뼛 뻗은 노란 꽃잎을 세운 채 한껏 그 자태를 뽐낸다. 살기 위한 발버둥인지, 그저 땅에 뿌리 내려진 자연스러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이 칠한 돌무더기 사이, 그렇게 꽃은 살아가고 있었다. 오랜 기간, 같은 곳을 지나는 동안 사람들이 쌓아 올린 흙더미만 보이던 나에게 점점 꽃이 눈에 들어왔다.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는 속삭임이 들려오듯 오늘따라 유난히 샛노란 꽃잎들이 눈에 밟힌다.     

 짧은 출근길도 잠시, 어느덧 병원에 발이 닿았다.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인 곳. 그 안에서 수많은 생명이 피고 있었다. 인명(人命)이라는 가느다란 가지를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벽 안에 들어가 뿌리내린다. 살겠노라는 갈망이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한 까닭일까.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게 뿌리 내려진 환자들의 희로애락을 생기롭게 보여준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 모든 삶에 대한 표현이 그들이 세우는 꽃잎의 자태를 은은히 드러낸다.


 처음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나에게 그곳은 단순히 회사였다. 극한직업이었고 체험 삶의 현장이었다. 의료의 대부분은 서비스기에 친절을 행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 이유일 뿐, 환자는 고객으로 대했고 치료는 오직 일이었다. 나의 실력이 부족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정을 섞지 않는 게 당시엔 프로 의식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치료를 위해 흘러가던 삶을 멈추는 공간. 병원에 대한 인식이 이랬던 탓인지 나의 사고 안에서 사회와 병원을 분리했다. 병원을 마치 당연하게 지나쳤던 아스팔트 담장처럼 생각한 나머지 무심코 사람마저 흘려보낸 무심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꽃이 눈에 담기듯 사람도 가슴에 담기어 갔다. 극한직업과 같던 병원도 차츰 인간극장 같은 삶의 터전으로 바뀌어 있었고 서비스로만 대했던 친절이 가족 친지를 대하는 애틋함으로 바뀌었다. 삶의 애환을 담긴 생존 투쟁이 비록 병원이라는 벽에 갇혀 자라고 있을 지라도 그 또한 인생이었다. 시간은 내게 그 삶들을 보게 해 주었다. 본다는 것은 인지한다는 것. 그 삶을 보게 되었을 때 내 삶도 그 안에 녹아들 수 있게 된다. 시간이 흘러 나도 그들과 함께 피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그 길을 걷고 있노라면 노랗던 꽃잎도 하얗게 물들어 가며 가볍게 날아갈 준비를 한다. 조그마한 솜털 하나가 날아 어딘가에 닿는다면 그곳에서 새로운 뿌리를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스팔트, 돌무더기에 피어난 꽃. 꽃 한 송이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생명을 끊임없이 갈구한 덕에 몇 배나 되는 새로운 삶은 담은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흘러갈 수 있었다. 비록 몇몇은 뿌리조차 맺지 못하겠지만 단 하나의 씨앗이라도 어딘가에 뿌리내릴 수 있다면 짧았던 꽃 한 송이의 생애가 충분히 보상될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병원의 많은 인파가 병원 문을 넘어가기 위해 투쟁할지라도 누군가는 그 문턱을 넘지 못한다. 허나 벽을 넘어 나가는 한 명의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삶은 분명 찬란하게 뿌리내리리라 믿는다. 비록 척박한 병원 안 그 세상은 척박한 아스팔트 길일 지라도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삶을 찾아 떠나는 씨앗으로 날아갈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묵묵히 오늘을 보낼 것이다. 한껏 생기를 뿜어내는 노란 꽃잎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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