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문에 상경한 뒤 어느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살고 있다. 그간 20대의 발자취를 보자면 서울 → 부산 → 서울 → 부산 → 김포 이렇게 된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만큼 이사도 잦았다. 화살표들은 곧 이사 횟수일 텐데, 두 번째 이사부터 이삿짐에 항상 빠뜨리지 않고 챙기는 정든 물건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물건은 바로 오스프리 가방이다. 이 배낭을 구매한 2017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한 뒤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난 적이 없다. 가뜩이나 좁은 원룸의 옷장이나 수납장 구석 한자리를 차지했지만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부산으로, 그리고 김포로 이사 오면서도 이 가방은 항상 나와 함께였다.
오스프리는 등산용품이나 배낭여행용 가방을 만드는 아웃도어 브랜드이다. 2017년 1월, 바로 다음 달에 떠날 배낭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장만했다. 제일 중요한 배낭을 골라야 했다. 가장 대중적인 브랜드가 오스프리, 그레고리 등이 있었는데 나는 오케이몰에서 세일을 많이 하고 있던 파란색 오스프리 카이트 46L 가방을 20만 원 정도에 구매했다. 이 가방을 메고 2017년 늦겨울~초여름 6개월의 기간 동안 유럽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홀로 떠나는 첫 해외여행인데다가 원체 걱정이 많은 성격인 나는 늘 터지기 직전까지 배낭을 그득그득 채웠다. 그중에는 필요한 것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챙겨야 했나 싶은 것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은 러닝화와 마사지볼. 유럽의 낯선 도시를 내 두 발로 달리는 건 상상만 해도 너무나 낭만적이었다. 그래서 다른 짐으로도 미어터질 것 같은 배낭 구석에 부피가 큰 아식스 젤카야노 러닝화를 갖고 다녔다. 그리고 여행하는 동안 딱 4번 뛰었다. 한 달에 한 번도 안 뛴 셈이다. 마지막에는 러닝 용도가 아니라 일상화로 신고 다녔다. 배낭여행에서는 많이 걸을 수밖에 없으니 종아리나 발을 틈틈이 마사지 해야겠다 싶어서 챙긴 마사지볼은 정말 쓸모없었다. 근데 부피는 작아서 결국 여행 끝까지 가지고 다녔다.
오랜 여행을 끝내고 나서는 어마무시한 크기의 배낭을 쓸 일이 없었다. 평소 등산을 즐기지도 않았고, 그 뒤로는 주로 국내 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무식하게 짐이 많지도 않았다. 짐을 많이 챙기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달았기 때문도 있다. 그래서 지난 5년 동안 파란색 배낭은 2017년 구매했을 때 처음으로 사용하고 줄곧 옷장 구석 신세를 지고 있다. 정리전문가가 보면 속에 천불이 날 노릇일게다. 실용성은 물론 앞으로 쓸 계획도 없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니 당장 당근마켓에 올려버려야 할 매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난, 이 배낭을 버릴 수가 없다. 이 배낭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때처럼 훌쩍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낯설고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도 뽈뽈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보면서 신나 하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돈 써가며 시간 써가며 쌩고생하냐며 자신을 비난하기도 했던, 그 순간으로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퍼렁색 오스프리 배낭을 볼 때마다 23살의 패기로운 박소연이 생각난다. 친구들이 대학에서 열심히 3, 4학년을 보내고 있을 때, 나 혼자 2년을 휴학하고 부산에 내려왔다. 1년은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하면서 여행 경비를 모았고, 나머지 1년은 그 돈을 펑펑 쓰면서 여행을 다녔다. 그땐 걱정이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은 마음만 먹으면 실행할 수 있었다. 세상일이 내 맘대로 척척 풀릴 것만 같은 기대에 가득 찼다. 해맑은 시기였다.
2020년 재수로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11월, 1차 시험을 코앞에 두고 오스프리 배낭을 또 샀다. 앞서 말한 내 처지를 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시험 망치면 출가할 용도... 일 수는 있었겠다만 그때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새 배낭을 산 사실을 엄마한테 걸리면 얼마나 욕을 먹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기에 독서실에서 택배를 수령했다. 당시 독서실 바로 옆자리에서 같이 공부하던 여동생 덕에 금방 뽀록나버리긴 했지만.
모든 충동구매가 그렇듯 처음부터 배낭을 살 생각은 없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한 나머지 스마트폰으로 오케이몰을 구경하고 있었다. 오케이몰은 나에게 현실 세계의 도피처였다. 언젠가 여행을 떠난다면 뭘 장만하면 좋을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장바구니를 채워가는 게 소소한 낙이었다. 여행 가방 코너를 들어가 보니, 떨이 세일하고 있는 초록색 오스프리 페어뷰 55L 가방이 눈에 띄었다. 8만 원 정도의 가격이었다. 이거는 거저다. 진짜 안 살래야 안 살 수 없었다. 페어뷰 시리즈는 여행에 특화된 배낭이다. 생긴 게 되게 특이한데, 가방이 백팩인 부분(15L)과 짐을 넣는 부분(40L)으로 분리된다. 짐을 넣는 부분은 캐리어처럼 전면 개방이 가능하다. 그래서 짐을 싸고 풀기가 굉장히 편하다. 숙소에 짐을 놔두고 백팩만 분리해서 돌아다니면 된다. 그런 가방을 8만 원에 구매할 수 있다니!
파란색 카이트 46L가 있었지만 그렇게 새로운 오스프리 배낭을 들였다. 암울했던 인생이 갑자기 설레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지 떠날 수 있는 배낭이 있는 사람이야. 어둑한 독서실에 우두커니 앉아있다가도 책상 구석에 고이 모셔둔 초록색 페어뷰 배낭을 볼 때마다 흐뭇했다. 그리고 그 뒤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초록 가방을 사용하지 않았다. 중고 거래 소개글로 묘사하자면 포장만 뜯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이었다. 충동적으로 구매한 상품의 운명이 으레 그렇듯 언젠가 써야지, 써야지 생각만 했다. 하지만 가방들은 늘 나랑 함께 있다. 파란색 배낭과 함께 구석에서 먼지를 먹으면서도 언젠가 세상빛을 보게될 날을 기다렸다.
올해 여름 또 오스프리 가방을 구매했다. 다행히 여행 배낭은 아니고 백팩이다. 기존에 백팩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제대로 된 게 없었다. 그 동안 스파오에서 세일하는 것들만 사서 쓰니 우리 학교 학생들의 가방과 내 것이 구별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중학생이랑 같은 가방을 메고 다닐 수는 없잖아. 튼튼하면서 조금은 멀쑥한 디자인의 백팩이 필요했다. 그렇게 검색하고 또 하면서 발견한 오스프리 아케인 라지 (20L).
뚝섬역에 있는 오스프리 매장에서 10만 원 정도 주고 구매했는데, 내 인생 백팩이 되었다. 매일 매일 출근할 때, 운동 갈 때, 주말에도 항상 메고 다닌다. 용량이 넉넉하고, 디자인도 깔끔하고, 수납공간도 잘 분리되어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 백팩의 매력은 날 설레게 한다는 거다. 백팩 중앙에 재봉 된 오스프리 로고를 보고 있으면, 2017년에 떠났던 배낭 여행의 철없는 설렘이 떠오른다. 호기심과 두려움을 품고 유럽의 낯선 도시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뚜벅뚜벅 발걸음을 내딛었던 그날이 생각난다. 덕분에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면 2022년의 지극히 평범한 오늘 하루가 아주 조금 생경해지는 기분이다. 왠지 모르게 흥이 난다. 재미난 일을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빨간색 오스프리 백팩을 메고 여기저기 걸어 다닌다.
이번 겨울에는 여행을 떠날 거다. 사놓고 2년 동안 묵혀만 두었던 초록색 페어뷰 가방을 메고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예정이다. 처음 보는 사람과 얘기하고, 낯선 사투리를 어줍잖게 따라 해보면서 오랜만에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나날을 보내려고 한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도 오스프리 배낭 안에 러닝화를 챙길 거다. 인간은 어리석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에. 얼마 전에 낯선 여행지에서의 러닝 경험을 소개한 글을 읽으면서 나도 이번 여행에서 달리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소름 돋게도 5년 전처럼 아식스 젤카야노를 신을 것 같다. 중간에 미즈노 웨이브라이더로 갈아탔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5년 만에 아식스 젤카야노와 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데자뷔인가. 아 그래도 마사지볼은 안 챙길 거다. 그건 진짜 쓸모가 없다는 걸 배웠다.
나는 매일매일 오스프리 백팩을 메고 다니고, 옷장에는 일 년에 한 번도 채 쓰지 않는 오스프리 배낭 두 개가 항상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사용 빈도는 극과 극이지만, 그 가방들은 항상 날 두근거리게 한다. 빨간 가방은 지극히 똑같은 일상을 조금은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파란 가방은 5년 전 떠났던 여행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초록 가방은 언제 떠날지도 알 수도 없지만 '이번 겨울에는 꼭 배낭을 메고 떠나봐야지.' 막연하게나마 결심하게 한다.
오스프리 컬렉션
아무리 생각해도, 전 오스프리 가방을 버릴 수가 없어요. 일본의 유명한 정리전문가 곤도 마리에가 말한 명언이 있잖아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의 제목이기도 하잖아요. 근데 저에게 오스프리는 반복되고 뻔한 일상에도 약간의 두근거림과 설렘을 만들어 주거든요. 발걸음이 아주 조금 더 신나게 되거든요. 그래서 저는 오스프리를 좋아하는 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