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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연 Dec 16. 2022

김포에서 내 이웃은 학생

이 정도면 김포 인싸 아닌가

일요일 아침, 서울로 가기 위해 장기역으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개찰구를 통과하려던 차에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옆 반 정현이다. 정현이도 날 알아봤을지 알 수 없어서 인사할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슬쩍 눈치를 보니 "일요일 아침부터 학교 선생님을 만나서 당황스러운데,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흔들리는 동공"을 하고 있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정현아 안녕!"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일요일 아침부터 혼자 어디 갔다 오는 거야?"
"교회요. 선생님은 어디 가세요?"
"아, 나는 서울 갔다 오려고."
"또 소개팅 가시는 거예요?"
지난주 목요일 1반 수업에서 오늘 퇴근하고 소개팅하러 간다고 말했더니, 아이들은 나를 '소개팅 중독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소개팅이 성공했으면 억울하지는 않으련만,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한동안 소개팅 망한 선생님으로 놀림당할 예정이다.
"아니거든! 내가 맨날 소개팅하는 줄 아나. 집에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학교에서 만나자."
"네, 안녕히 가세요."

학생은 1년에 만나는 선생님이 열 분 남짓이니 선생님 얼굴과 성함을 비교적 빠르게 기억하고 알아본다. 하지만 선생님은 마주하는 학생의 수가 훨씬 많기 때문에 모든 학생의 얼굴과 이름을 다 기억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특히 마스크를 매일같이 써야 하는 요즘의 상황에서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내가 수업 들어가는 반의 아이의 이름을 빠르게 불러주지 못해 미안한 상황도 가끔 발생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수업 들어가는 반 학생의 인상은 빠르게 기억하는 편이어서, 교실 밖에서 지나치더라도 살갑게 인사를 할 수 있다.
거기에 나와 학생들의 생활반경이 거의 일치하는 터라 장기동에서 학생들을 많이 알아보고, 위와 같이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누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갑게 인사만 나누면 좋으련만, 학교 밖에서 아이들과 뜻하지 않게 마주치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많이 생긴다.


지난 여름, 폭풍 같은 월화수목금이 끝나고 모처럼 여유롭게 토요일 브런치를 즐기기 위해 맥도날드에 갔다. 맥모닝 중에서 가장 푸짐한 디럭스 브렉퍼스트를 커피와 함께 주문하여 맛있게 먹을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가 옆 테이블에서 들려왔다. 긴장한 눈빛으로 살짝 훔쳐보니 학기초부터 나를 놀리기 좋아하는 4반 승준이가 가족과 함께 앉아 있었다. 만약 그 상황에서 서로를 알아본다면 먼저 학생 부모님과 어색한 인사를나눠야 할 것이고, 다음 주 학교에서는 '가정선생님 혼밥 목격담'이 널리 퍼질 것이 분명했다. 결국 아는 척 하기를 포기하고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쓰고 핫케이크를 우적우적 썰어 먹었다. 아마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어딘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 또는 유명 연예인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올해 초 겨울 소개팅 (아아... 난 소개팅을 이다지도 많이 한 것인가) 에서 두 번째 만남을 할 때 상대분께서 장기동까지 친히 와주셨다. 유명 맛집인 락원에서 떡만둣국을 먹고 어색한 대화를 나누며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하필 그 타이밍에 우리 학교 말썽꾸러기들이 모퉁이에서 자전거를 타고 등장해버렸다. 나는 빠르게 그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바로 눈을 내리깔며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제발....' 하지만 그럴 놈들이 아니지. 이놈들이 갑자기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열심히 시선을 바닥에 처박고 있는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평소 학교 복도에서 마주쳐도 인사 안 하는 학생들의 낄끼빠빠를 모르는 눈치없는 인사 덕에, 소개팅남 앞에서 참 뻘쭘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5월인가, 저녁쯤에 어중간하게 출출해져 학교 앞이자 내 집 앞에 있는 간식창고에서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나 뒤적이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머리를 아무렇게나 질끈 묶고, 펑퍼짐한 바지와 샛노란색 티셔츠, 거기에 크록스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 반 서현이를 만나게 된다. 서현이는 나를 발견하더니 눈이 두 배 정도 커지면서 "서,,, 선생님!!! 안녕하세욧!!!" 하고 화들짝 놀랐다. "안녕하세요"는 거들뿐, 그 말은 인사가 아니라 "아이고, 깜짝이야!" 하며 놀라는 학생의 비명이었다. 분명 내가 아는 담임선생님이긴 한데, 오늘 학교에서 본 인물과 저 꾀죄죄한 몰골의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 동그랗게 커진 눈과 경악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색하게 인사를 한 뒤 빈손으로 간식창고를 나왔다. '배고파도 그냥 참을걸. 곧 우리 반 단톡방이 시끄럽겠구나. 귀가 근질근질하네.'라는 씁쓸한 마음과 함께.
이제 집 앞 마트에서 맥주, 소주를 사다가 학생과 학부모님을 마주치고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일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일어나는 익숙한 일이다.


여기까지는 뭐, 즐겁게 웃을 수 있는 귀여운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압권이 등장한다. 수영장에서 우리 학교 학생들을 마주해버렸다. 지난 여름부터 동네 수영장에서 강습받고 있었다. 동네 수영장에서 강습받기란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첨되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때마침 운 좋게 당첨되어 "나는야 럭키걸" 이라고 마음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수업을 들으러 갔다.
그런데... 수영장 건물 앞에 자전거를 세우는 남학생 3명의 옷차림이 너무나도 익숙하다. 우리 학교 체육복이다.
아뿔싸, 너희들 학원 안 가고 수영 배우는구나. 그렇지, 운동하는 거 정말 바람직하고 좋지. 그런데 하필 내가 수업을 듣는 바로 이 시간에 수영을 배우는구나. 원치 않게 나와 너희의 수영복 차림을 서로 공개해야만 하는 거로구나.

수영장 가는 길, 우리 학교 체육복이다. 너도 수영 가니.

나는 작년에는 올해 3학년이 된 2학년을 가르쳤고, 올해는 1, 2학년을 담당하고 있기에 현재 1~3학년 중에서 내 수업을 들은 아이들이 많다. 즉 학교 체육복을 입는 아이들이라면 절반 이상이 내 수업을 들었으니 그들 중에 나를 알아보는 학생이 있을 확률이 크다는 말. 그리고 불행한 예감은 늘 그렇듯 틀리지 않았다. 지난 1학기까지 내가 가르쳤던 학생 1명을 포함한 2명이 바로 옆 레인, 그리고 1명은 나와 같은 레인에서 수업을 들었다. 화, 목요일 수영 수업할 때마다 혹시나 학생들과 눈이 마주칠까봐 자주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시선이 향하는 방향과 주의를 집중하는 곳을 분리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아마 그 학생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즐겁게 수영하러 왔는데 학교 선생님과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들어야 한다니, 반대 입장이어도 등골이 서늘할 일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10월 수영강습 추첨에서는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듣는 수영강습 수업은 한 달로 막을 내렸다.

극단적인 사례들을 나열해서 그렇지, 사실 난 학교 밖에서 학생들을 만나길 좋아한다. 우연히 만난 아이들과 인사를 나눌 때 반갑고, 학생들이 귀엽다. 이따금 발발하는 난감한 경우도 인생의 재미있는 한순간이니 마냥 싫은 것만도 아니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 학생들을 만나 인사를 나눌 때면 그들의 일상에서 살고 있는 어른이 된 것만 같다. 욕심일 수도 있지만 나는 12년이라는 긴 학창 시절에서 학교에서 만나고 잊히는 수많은 어른 중 하나가 되고 싶지는 않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처럼 학생의 삶을 바꾸는 참선생님이 되고 싶은 건 아니고, 그저 좋은 어른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것도 평생토록 나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달라기보다는, 내가 너희와 함게 수업하는 기간만이라도 학생-교사의 만남보다는 사람-사람의 만남으로, 알고 지내는 어른이 되었으면 한다.
학생과 나의 사이를 학교라는 공간에 국한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외로움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아이들은 사사건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또 나의 관심을 원한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선생님을 찾고, 나는 하루에도 수많은 학생의 이름을 외치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끔씩은 연예인이 되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하기도 한다.
교문을 나서는 순간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다. 학교에서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서로 주고받다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곧바로 혼자가 되어 고독의 시간을 보낸다. 이러한 태세 전환이 퇴근 직후에는 단비처럼 느껴져 입을 꾹 닫고 있는 시간을 즐기다가도, 어느 순간이 지나면 심심하고 또 외로워진다. 슬그머니 날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학교 학생들을 학교 밖에서 만나면 되게 반갑고 고맙다. 이 낯설고 큰 도시에, 나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생각해보면 여기 장기동에 나를 아는 수백 명의 학생이 있는 것이니, 이정도면 김포 시장 못지 않은 인싸라고도 할 수도 있다. 덕분에 외지출신 경기도민의 헛헛함을 잠시 잊고, 이 도시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갈 수 있다.


가끔 우리 중학생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상상한다. 혹시나 길거리에서 마주친다면 너희를 알아볼 수는 있을까.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많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스타일도 많이 바뀔 것이고, 훌쩍 자라있을 테니 곧바로 알아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욕심이 있다면, 학생들이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내 얼굴은 지금과 최대한 달라지지 않도록 성형도 안 하고 노화방지에도 열심히 힘써보겠어.
시간이 많이 지나서 우리가 우연히 마주칠 곳이 김포일지, 서울일지, 또는 뜬금없이 외국일지 모르겠다. 그렇게 만나게 되면 소개팅 중독자였던 선생님을 기억하고, 인사해줬으면 좋겠다. "저 2022년도 장기중학교 누구인데요. 안녕하세요 선생님!"이라고 말해주면, 상상만해도 난 정말 너무 반갑고 고마울 것 같다. 이 세상에 나라는 사람을 기억해주고 인사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황홀한 일이니 말이다.
그러니 나도 너희를 좋은 마음으로 기억해야겠다. 내일 출근인데, 마음을 너그럽게 먹어봐야지. 화를 덜 내고 학생의 좋은 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지. 개개인에게 조금 더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봐야지. 망한 소개팅으로 놀리는 아이들에게 애써 온화한 미소를 지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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