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은 정말이지 지독하게 추웠다. 지독히도 말 안 듣는 학생처럼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막무가내 추위였다. 꽁꽁 싸매어 빈틈없이 피부를 가려봐도 어디선가 날카로운 찬바람이 들어왔다. 이 날씨에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실내로 도망가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추운 날, 나는 연희동에 갔다.
'연희'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려움 없이 곱게 자라와 성격이 차분하고 옷차림이 단정한 여학생이 떠오른다. 실제로 연희동의 첫인상은 그와 비슷했다. 키 작은 주택과 기껏해야 5층 남짓의 낮은 상가건물이 모여있는 단정한 동네다.
연희동에는 20살에 과외를 하러 왔던 인연이 있다. 연희동 초입에 있는 대우아파트였는데, 홍대입구역에서 어중간하게 떨어져 있어 두 정거장 내외의 짧은 거리를 가기 위해 굳이 환승해야 하니 몹시도 귀찮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런 동네는 역세권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투덜거리면서 되게 성가셔했다. 그때도 겨울이었으니, 처음 맛보는 서울의 추위에 기겁하면서 마음가짐이 다소 삐딱했을 거다.
이번엔 동네를 천천히 구경하고 걸어다니면서 여러 상점을 가보려고 연희동에 들렀다.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상점 중 몇 가게의 주소에 '연희'라는 이름이 들어있었다. 궁금한 가게들이 모이자 언젠가 직접 그 동네에 가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드디어 방문하기로 결심했는데, 하필 이렇게 추운 날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홍대입구역에 내렸다. 네이버 지도가 홍대입구역에서 연희동까지 도보로 27분이 걸린다고 알려줬다. 낯선 동네를 구경하는 걸 좋아하기에 한 시간이 넘는 거리도 곧잘 걸어 다니지만, 그날만큼은 걸어갔다간 삶과 맞바꾼 마지막 산책이 될 수도 있었다. 홍대입구역의 버스정류장에서 오들오들 떨다가 7634였나 7612였나 한때 익숙했던 버스를 탔다. 버스의 창 너머로 눈에 익었던 거리가 지나갔다. 아 저기 GS25에서 과외 마치고 삼각김밥 사 먹었는데, 신협 앞에서 버스 탔는데, 가끔 과외돌이가 바래다주기도 했었지. 하면서 잠깐 추억 놀이를 하다 보니 십 분도 채 안 되어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연희동 자치회관 정류장에 내려서 주변을 쓱 둘러봤다. 아담하면서도 있을 건 다 있는, 여기저기 낡은 흔적이 보이는 동네. 여기가 연희동이다.
이번 연희동 방문에서 중심이 되는 가게는 상점 글월이었다. 즐겨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스치듯이 소개되어 알게 된 가게다. 요즘 사람들에게 거의 잊혀진 손 편지를 주제로 하여 편지지와 필기구를 판매하는데 내 관심을 끈 것은 펜팔 서비스였다.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를 남기고, 모르는 사람이 남긴 편지를 가져가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말로만 듣던 펜팔인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궁금해졌다. 누가 읽을지도 모르는데 그에게 주절주절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나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주절주절 써 내려간 이야기를 읽는 것.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낭만을 느껴보고 싶었다.
상점 글월은 1층 피터팬1978 빵집이 있는 건물의 4층에 있다. 글을 쓰면서 알았는데 수요미식회에도 소개된 유명한 빵집이란다. 오래되고 썰렁한 건물은 빵집의 고소한 버터 냄새로 가득했다.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허름한 건물이지만 계단을 올라가면 정말 4층에 편지 가게가 있다. 문 여는 시간에 맞춰 방문한 상점은 참 작았다. 3-4사람만 있어도 꽉 차게 느껴질 정도다. 다행히 좁은 공간 덕분에 빠르게 난방이 되어 맹추위에도 실내는 아늑했다. 작디작은 공간이지만 제품을 진열한 매대와, 한쪽에는 앉아서 편지를 쓸 수 있도록 구색을 갖춘 의자와 테이블이 있다.
펜팔 서비스를 이용하고자 만 원을 내고 편지지와 편지 봉투, 그리고 우표 스티커를 받았다. 편지지는 처음엔 한 장을 주고 쓰는 만큼 제한 없이 추가 제공한다. 종이를 받아 들고 의자에 앉아 주섬 주섬 필기구를 꺼내어 편지 쓸 준비를 했다. 만년필 잉크를 견디는 종이라기에 촉이 굵은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무슨 말을 쓸지는 아직 모르지만, 인사로 시작하는 게 예의니까 '안녕하세요?' 를 썼다. 아뿔싸, 잉크가 번졌다. 혹시 이 글을 보고 글월에서 펜팔 편지를 쓰신다면 볼펜이나 연필을 추천합니다. 만년필은 아니에요. 가장 얇은 촉의 만년필로 바꾸어 들고 추운 날씨에 대한 지독함을 토로하면서 어색하게 첫 문장의 운을 띄웠다.
이전에 영국인은 변화무쌍한 날씨 얘기 없이 대화를 시작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글을 읽으면서 실없는 우스갯소리라며 웃고 넘겼는데, 웬걸 나도 마찬가지였다. 추운 날씨는 어색한 펜팔 편지를 시작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날씨 얘기는 영국 사람들뿐 아니라 만국 공통의 소중한 대화소재가 아닐까.
펜팔 편지를 쓰는 건 길거리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아무나 한 사람을 붙잡아 밑도 끝도 없이 내 이야기를 건네는 느낌이었다. 마치 '도를 아십니까'가 된 것 같은 기분. 낯선 사람에게도 능숙하게 말을 거는 그들도 맨 처음에는 되게 민망했겠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쭈뼛거렸는데 눈 딱 감고 얼마간 내 얘기를 말하다 보니 상대가 편해지면서 수다에 속도가 붙었다.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성격인지, 나보다 어린지 아니면 훨씬 나이가 많은지, 그 어떤 정보도 없는 사람에게도 이런저런 얘기를 써 내려갈 수 있었다. 지독하게 추운 오늘의 날씨, 2022년이 어떤 해였는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는 뭘 하는지를 조잘조잘 얘기했다. '도를 아십니까'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능숙하게 대화를 밀어붙이는 능력을 간접 체험했다.
끝까지 조심스러웠던 건 상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호칭을 선택하는 문제였다. 편지도 대화의 한 방식이니 말을 하다 보면 상대를 지칭하는 단어가 필요한데 마땅한 단어가 없었다. 가뜩이나 모르는 사람인데 '당신'은 너무 예의 없어 보였다. 언제 봤다고 당신이야? '독자'라고 하기에는 다수를 향한 글을 쓴 게 아니니 상황에 안 맞았다. '그대'는 너무 느끼했다. 결국 문장에서 상대를 지칭하는 단어를 최대한 피하되 어쩔 수 없는 순간에 '편지를 읽으시는 분'이라는 흐리멍텅한 지칭을 사용했다. 작은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호로록 마시면서 한 시간 정도 앉아있으니 '편지를 읽으시는 분'을 향한 글은 3장의 편지지를 빼곡히, 한 장의 편지지를 2/3쯤 채웠다. 종이에 미세하게 번지는 잉크가 눈에 거슬리면서도 중간에 연필로 바꾸는 건 자존심 상하니 마지막 문장까지 꾸역꾸역 만년필로 마무리했다.
이렇게 모자이크 할 거면 왜 올린 거지
오고 가는 말은 많았는데, 되돌아보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는, 그래도 함께한 순간이 우습고 즐거웠다는 감정만 떠오르는 그런 대화를 닮은 편지가 되길 바랐다. 웃기지는 않지만 상대의 노력이 가상하여 피식 웃어주고 마는 그런 대화. 내 편지를 읽고 어떤 감상을 하실까. 비웃으실까, 가볍게 코웃음을 내보이실까, 그것도 아니면 폭소하실까.(이건 무리다) 뭐가 되었든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순간 읽는 분의 마음이 수다스러워지길 바라며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내가 쓴 편지
내 편지를 선택하실 분에게 내 정보를 알릴 수 있도록 편지 봉투에 나를 설명하는 여러 수식어를 골라 동그라미 쳤다. 명랑한, 책 읽기를 좋아하는, 예의가 바른, 수다스러운 등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들이다. 몇 가지 고민했던 수식어는 '착한, 이상한, 얼빠진, 유머러스한'. 스스로를 착하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진짜로 착한 사람은 본 적 없기에 '착한'은 패스. '이상한, 얼빠진'은 맞는 말이지만 편지 쓴 사람을 수상하게 여겨 내 편지가 그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할까 봐서 기각했다. 유머러스하면 좋겠지만 막상 웃기길 기대하고 읽은 편지가 노잼이면 실망하실 테니 안되겠다. 적당히 걸러진 자기소개와 함께 우표 스티커에는 내가 밀고 있는 소 캐릭터를 그려 넣었다. 그 뒤 날짜, 시간, 날씨를 채웠다.
날씨 : 너무 춥다요...!
귀여워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이상한 비문을 써버렸다. 봐주십쇼.
겨울 햇살을 받으며 받는 이를 기다리는 편지들.
4장의 편지지를 담은 봉투는 조금 두툼했다. 양보다 질이라고 하지만, 질을 보장할 자신이 없으면 양이라도 있어야지. 적어도 읽는 사람이 지루하지는 않겠다며 안도하고 편지를 편지함에 넣어두었다. 이제 가져갈 편지를 고를 차례다. 오래 고민하다가 날씨 칸에 감기 조심하라고 쓰인 편지 봉투를 집어 들었다. 감기 조심하라니, 감기약 회사 광고도 아니고 마음이 너무 귀엽잖아. 추운 날씨를 귀엽게 표현하는 공통점에 꽂혔다.
그렇게 받아 든 편지의 내용은... 나만 알 거다. 이분이 편지를 쓴 '아무개'는 나이기 때문이다. 편지의 글쓴이에게 허락받지 않고 내용을 공개하는 건 '예의가 바른' 수식어에 동그라미를 친 사람의 행동이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느낀 점을 말하자면, 편지를 단숨에 읽어내리고 나서 역시 귀여운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생각했다. 연필로 써 내려간 편지도 예쁘다는 걸 알았다. 삭막하고 긴장 가득한 하루에 말랑함이 필요할 때 꺼내어 읽고 싶을 만큼 귀여운 내용이었다.
추위를 뚫고 연희동에 온 보람이 있었다. 그 덕분에 어색한 편지의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있었고, 감기 조심하라는 귀여운 편지를 고를 수 있었으니 펜팔을 하면서 조금 더 각별한 의미가 더해졌다. 다음에도 또 올 건데, 그때는 연필로 편지를 써야겠다. 어김없이 수다스럽고 우스운 마음을 보여주고 귀여운 편지를 또 골라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