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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연 Dec 25. 2022

카스, 테라를 한 병씩 사는 여자

계속 고민만 한다면 무엇을 하리오


병맥주를 샀다. 카스 한 병 테라 한 병. 두 맥주의 이름을 이어 부르니 카스테라다. 테라는 카스보다 한참 뒤에 출시되었는데 테라 기획자들은 이를 겨냥한 듯 싶다. 훗날 카스 한 병 테라 한 병을 사고 카스테라 라며 피식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예상했을 거다. 카스 두 병 살 바에는 카스 한 병과 테라 한 병을 구매하게 하는 판매 전략이 아니었을까.
그 전략에 낚여 각 1병을 구매한 건 아니고, 사고 보니 카스테라였다. 혼술을 즐기는데 한 병 500ml는 아쉽고 두 병 1,000ml는 과하다. 아쉬움과 과함 사이에서 잠시 갈등했으나 어리석은 나는 대개 과함을 선택하는 편이다. 과유불급이라고 수천 년을 관통해 전해 내려오는 사자성어가 있지만, 날 지배하는 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만들어진 지 십 년도 채 안 된 밈과 짤이다. 과유불급이 그 오랜 기간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는 한결같은 인간의 어리석음 덕이겠다.

카스와 테라는 집 앞 마트에서 서로의 옆자리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테라는 왼쪽, 카스는 오른쪽. 가격도 1,750원으로 똑같다. 내 입맛이 예민하지 않은 건지, 실제로 차이가 별로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두 맥주의 맛도 거의 똑같다. (그래도 필라이트가 별로라는 건 확실히 안다.)
카스의 홍보 문구는 '저온 숙성으로 프레시하게'. 신선하다는 우리말이 있는데 굳이 프레시라고 말하는 게 영 마뜩잖다. 테라는 '호주 청정 맥아로 만든 100% 리얼 탄산 맥주'라는 문구가 있다. 우습다. 대학교 입학 자기소개서에서 '식품의 허위 과장 광고를 지적하고, 국민이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바른 지식을 널리 알리고 싶다'며 큰소리를 뻥뻥 치고, 그렇게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한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데 높은 확률로 다 헛소리다. 홍보 문구는 사실이긴 하겠지만 대부분 실속이 없다. 그러니 둘 다 또이또이, 거기서 거기다. 차라리 파란색을 좋아하면 카스, 초록색을 좋아하면 테라를 선택하라는 지침이 소비자의 선택에 더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러면 너는 왜 테라 두 병도, 카스 두 병도 아닌 각각 한 병을 구매한 것이냐. 카스테라를 노린 것도 아니라면서. 파란색도 좋아하고 초록색도 좋아하는 것이냐. 아니다. 연민 때문이다.
같은 브랜드 맥주를 두 병 담기에는 바로 옆에 앉아있는 맥주가 불쌍해서 그랬다. 왼손잡이라서 자연스럽게 왼쪽에 있는 테라에 먼저 손이 갔다. 그러다 카스랑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어쩌고? 테라만 데려갈 거야?' 진열장의 조명을 반사하며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카스가 날 바라보는데 어찌 테라만 두 병 담을 수 있을까. 카스도 한 병 담았다. 테라의 모회사 하이트진로와 카스의 모회사 오비맥주에 동일하게 이익을 배분했다. 싸우지 마.

이제 안주를 고르러 가자. 과자 매대에 왔다. 또 고민이다. 매운 새우깡을 먹을까, 허니버터칩을 먹을까.

"계란을 한 면만 익힐지, 양면 다 익힐지에 대한 고민이라니. 아, 이건 정말 행복한 고민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런 고민이라면 얼마든지 하겠어요. 평소엔 뭐. 계란이 어디가 어떻게 익는지 알 게 뭔가요, 타지 않으면 그걸로 다행이지. 안 그렇습니까?"

윤고은 작가의 '밤의 여행자들' 소설에 나오는 문장이다. 뭘 고르든 간에 만족 정도 차이는 있더라도 실패는 없는 선택지들. 매운 새우깡도 정답이고, 허니버터칩도 정답이다. 뭘 선택해도 정답이라니 이토록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마음이 절벽 끝에 닿은 상황에서 가까스로 덜 불행한 선지를 골라야 하는 고민이 아니다. 어디 이런 고민이 흔한가.
여기서 각 선지의 만족도까지 완벽하게 예측하려는 건, 솔직히 욕심이다. 뭘 골라도 틀리지 않음이 확실한 그런 든든한 선택지가 내 앞에 놓여 있음에 감사할 일이지.
이런 선택만 가득한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요즘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고민의 선택지를 살펴본다. 어라, 그것들 모두 만족을 보장하는 든든한 구석이 있다. 몰랐는데 나 지금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구나. 왜 나에게 가혹한 갈등을 안겨주냐며 세상을 탓했던 시간이   머쓱해졌다.


고민 앞에 '행복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자 선택의 무게는 훅 가벼워진다. 뭘 골라도 좋은 선택이라는 것에 안심이 된다. 그러니 결정을 내리는 찰나의 순간 마음이 조금이라도 기울었다면 그대로 정답이라 밀어붙여도 되겠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이 세상 그 누구도 진짜 정답은 모르니 내가 옳다고 우기면 그만인 일이다. 그리고 좋은 점만 바라보며 나에게도 우기면 그만인 일이다.
이게 더 맘에 든다고 스스로 말하면, 이제 그건 최고의 선택이 된다.
그렇게 허니버터칩은 최고의 선택지가 되었다.

카스에서 테라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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