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의 공중 곡예사(열린책들, 2005)에 대한 서평
<공중 곡예사>는 세인트루이스의 부랑아 윌터가 예후디 사부를 만나 공중 곡예사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예후디 사부는 갑작스레 윌터 앞에 나타나 자신과 함께하면 '나는 법을 알려주겠다'라고 말했다. 예후디 사부는 분명 허무맹랑했으나, 그보다 허무맹랑한 것이 어머니를 여의고 삼촌의 폭력에 시달리는 자신의 처지였기에 윌터는 예후디 사부와 함께 캔자스 농장으로 떠났다.
예후디 사부가 말한 '하늘을 나는 법'은 비유가 아니었다. 예후디 사부는 윌터의 몸을 공중에 띄우고, 공중에서 이동하며 재주를 뽐내는 공중곡예사로 키우고자 했다. 그를 위해 윌터는 가혹한 수련을 소화해야 했지만, 이솝과 수아주머니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캔자스 농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 윌터는 흑인에다가 몸이 괴상하게 뒤틀린 이솝을 혐오했고, 인디언인 수아주머니 역시 여자는 맞는 거냐며 조롱했다. 하지만 윌터는 이솝에게서 우정을 배웠고, 수아주머니로부터 모정을 배웠으며, 자신의 재능을 끊임없이 믿어주는 예후디 사부로부터 사제의 정과 부정을 느꼈다. 예후디 사부를 진심으로 믿고 의지했기에 그가 자신을 버렸다고 오해한 순간 윌터는 텅 빈 공허와 절망과 함께 영혼이 흘러나가는 걸 느끼며 공기보다 가벼워졌다. 그 순간 윌터는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데 성공한다. 윌터는 온 가족의 축하를 받으며, 캔자스 농장에서 가정의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인생은 예측하기 힘든 물때와 같다. 언제 물이 얼마만큼 들어찰지, 파도는 어떻게 들이치며 이 해변을 가득 채울 것인지 알 수 없다. 물이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예후디 사부가 아무런 예고 없이 윌터를 찾아왔듯이, 이솝과 수아주머니 역시 갑작스레 윌터를 떠났다. 충격적인 사건에 의해 윌터는 갑작스러운 작별을 맞이해야 했고, 그날은 윌터가 하늘을 나는 법을 완벽히 익힌 날이었다. 바다를 모르는 사람들은 물이 얼마나 순식간에 빠지는 줄 모른다. 아마 예후디 사부와 윌터도 그랬을 것이다. 예후디 사부의 고향인 헝가리와 윌터의 고향인 세인트루이스에는 바다가 없으니 말이다.
늘 그렇듯 물은 또다시 갑자기 들이닥친다. 그들은 크나큰 슬픔을 극복하고 예후디 사부의 연인인 위더스푼 부인의 후원을 받아 '공중 곡예사'로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소소한 인기를 끌지만 이번 밀물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조카의 몸값을 요구하며 삼촌이 윌터를 납치했기 때문이다. 지옥 같은 시간을 이겨내고 탈출에 성공한 윌터는 말 그대로 승승장구하며 'Wonder Boy Wilter'라는 활동명에 걸맞은 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이번 밀물 기간 역시 짧았다. 이렇듯 이야기는 끝없는 밀물과 썰물의 연속이다. 윌터와 예후디 사부가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그 결실을 따먹는 밀물 기간과 모든 것을 빼앗기는 썰물 기간이 반복해서 배치된다.
기회 뒤 위기가 오는 구성이 너무 정석적이라 구조적 측면에서 조금은 지루했다. 하지만 나는 밀물 뒤 썰물이 오고, 썰물 뒤 밀물이 오는 것을 지루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밀물과 썰물은 지루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그저 자연의 법칙이다. 이토록 필력 좋은 작가가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반복한 것은 어쩌면 '기회 뒤 위기, 위기 뒤 기회' 그 자체가 인생의 법칙임을 강조한 것은 아닌가 싶다. 또한 윌터와 예후디 사부에게 있어 기회와 위기는 손 쓸 바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었기에, 작가는 인생에서 기회와 위기 둘 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도 이제 과학의 발달로 바다의 밀물과 썰물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리고 인생의 밀물과 썰물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누구보다도 거친 밀물과 썰물을 견딘 윌터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작가의 답을 알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작가의 답이 나의 생각과는 조금 달라 많이 당황스러웠다.
예후디 사부와 작별하고, 여러 일을 겪으며 마음이 황폐혜진 윌터는 노년에 들어서서야 겨우 위더스푼 부인과 재회한다. 그녀를 만나며 윌터는 길었던 방황을 끝낸다. 나는 윌터가 밀물과 썰물 속에서 살아남기 급급해 잊었던 것들을 다시 기억해 내면서 이야기가 끝날 것이라 기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후디 사부가 윌터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내가 너한테 가르쳤던 것들을 기억해.'였다. 내가 기대했던 결말은 윌터가 '밀물과 썰물 속 살아남고자 발버둥 쳤던 그 과정 그 자체'가 나 자신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나 자신을 잊고 인생 그 자체가 돼라.'라고 말했다.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윌터는 공중 곡예 비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는 예후디 사부가 가르쳤던 것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내심으로 나는 몸을 띄워 올려 공중에서 떠다니는 데 어떤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고는 믿지 않는다. (중략) 물론 그러려면 당신 자신이기를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출발점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신은 자신을 증발시켜야 한다. 근육에서 힘을 빼고, 당신의 영혼이 당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숨을 내쉰 다음, 눈을 감아 보라. (중략) 그러면 당신 몸속의 공허함이 당신 주위의 공기보다 더 가벼워진다.'
'밀물과 썰물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과정이 나'라는 나의 생각은 '나'를 증발시키지 못했다는 증명이다. 윌터의 서술대로라면 나는 절대 하늘을 날 수 없을 것이다. 즉, 밀물과 썰물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본질적으로 나 자신을 증발시켜 나 자신이 바다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나를 증발시킬 수 있는 걸까?
나 자신을 증발시킨다는 걸 '물아일체'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엔 이 소설에서 '물아일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윌터가 공중 곡예를 연마하던 순간뿐이었다. 그 이후에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너무 증발시켰기에 윌터는 필요 이상으로 고통받았다. 아니면 작가는 '윌터가 사부에게 배웠던 물아일체 정신을 잊었기에 그런 고통을 받았고 마지막에 다시 기억해 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야기 자체는 너무 재밌었지만 식견이 짧은 나에게 이 책은 주제를 잊고 등장인물이 움직이는 대로 글 쓰다가 갑자기 '아, 맞다, 주제!'이러면서 급하게 마무리한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작가도 자기 자신을 증발시키는 법을 구체적으로 몰랐던 것 같다.
폴 오스터의 또 다른 책인 <달의 궁전> 역시 등장인물이 운명에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보다는 인생 그 자체가 되는 듯한 선택을 한다. 굴곡진 운명에 반항하며 세계와 구분되는 투쟁적 자아를 가진 인물에 무한한 애정을 느끼는 나로서는 자기 자신을 증발시켜 등장인물 그 자체가 인생이 된다는 작가의 생각이 조금은 뜬 구름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다른 책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증발시키는 법'을 알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증발시키는 법'이 그저 세월에 마음이 닳아 깎여나가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길 바란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은 다른 독자님들의 여러 해석도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