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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서윤 Sep 03. 2023

때론 관객만이 의미를 찾아내는 법이다

요슈타인 가아더의 마야(현암사, 2006)에 대한 서평

평점: 3.5/5

한줄평: 작가님의 거시적인 인생관이 놀랍고, 내 삶이 수준 높은 관객의 해설을 기다리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삶에 대한 자기 정의를 남에게 미뤘다는 점에선 조금 무책임할지도?)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 읽어보면 좋은 책, 액자식 구성의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길


    센치한 밤이면 가끔 생명과 인류 지성의 의미를 생각하곤 한다. 필자의 전공은 생명과학이며, 지금도 가장 단순한 형태의 생명인 박테리아의 유전자를 조작해 밥벌이를 하고 있다. 목적에 따라 유전자를 주무르다 보면 생명이 그저 화학반응의 집합체처럼 느껴진다. 또 한편으론 그토록 단순한 형태에서부터 지구의 모든 생명이 시작됐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내게 남은 시간은 길어봐야 70년 정도 일 텐데 그때까지 생명과 인류 지성의 의미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을 알 수 있으려나?


    <마야>의 주인공인 진화생물학자 프랑크는 '인간이 영원히 살 수도 없고, 영혼을 지니고 있지도 못하다는 사실 때문에 평생 우울하게 살아가는 독특한 부류의 인간(<마야>에서 인용)'이다. 한창 뱀파이어 물에 빠져있던 중2 시절, 영생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을 고심하곤 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그나마 현실적인 방법은 자식을 낳아 지구에 내 DNA를 남기는 것이었다. 진화생물학자 프랑크와 그의 아내인 고생물학자 베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베라는 마시면 영생할 수 있는 마법의 물약 몇 방울을 구했다고 말하며 프랑크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딸은 불행한 사고로 어린 나이에 죽고 만다. 딸을 잃은 프랑크는 이토록 연약한 인간의 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건지, 그러한 인간의 지성은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며 고통받는다. 


    베라와 별거하게 된 프랑크는 집을 떠나 원시의 자연을 연구하고자 피지 제도를 방문한다. 같은 리조트에 묵던 사람들은 진화생물학자인 프랑크에게 평소 '진화'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며, 수 억 년 동안 진행된 인간으로의 진화 과정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토의한다. 사실 생명과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인간으로의 진화'라는 표현을 들으면 바로 머리가 아파온다. 인간은 진화라는 과정의 목적지가 아니며, 기나긴 지구의 역사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잔인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은 생명, 그 생존의 결과가 진화일 뿐이다. 프랑크 역시 동일한 입장에서 사람들에 그저 진화란 '우연의 연속'이며, 방향성 따윈 없다고 설명한다. 그런 프랑크에게 같은 리조트에 머물던 커플이 의문을 제기한다.


    어디서 본 듯한 아름다운 외모의 안나와 그녀의 연인 호세는 그 모든 '우연의 연속'을 뚫고 살아남아 지성을 피워낸 인류의 행운은 어떤 의미인지 묻는다. 긴 우연의 고리에서 피어난 인간 지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쩌면 인간은 그 의미를 멸종하는 순간까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심장만 몇 번 뛰다가 세계로부터 영원히 떨어져 나가는 존재(<이야기 파는 남자>에서 인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가 스스로의 의미를 밝히지 못한다 해서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는 건 아니며, 먼 훗날 다른 이에 의해 의미가 밝혀질 것이라 주장한다.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무려 '빅뱅'을 예시로 든다. 만약 '빅뱅'의 순간을 목격했더라면 우리는 그저 엄청난 섬광과 에너지, 끝없는 팽창만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세계의 시작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빅뱅'은 인류의 지성에 의해 140억 년 이후에야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듯 때론 일의 당사자가 아닌 관객만이 의미를 찾아내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을 개인의 삶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가족이 해체된 남자에게 삶의 의미가 먼 훗날 타인에 의해 해석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에는 예시로 든 '빅뱅'은 너무 거시적이다. 작가는 이런 비판을 예상했기에 이 소설을 쓴 것 같다. 어디서 본 듯했던 아름다운 '안나'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옷 입은 마야>, <옷 벗은 마야> 속 여인과 똑 닮았으며, 심지어 '안나'의 중간 이름이 '마야'였다. 작가는 위대한 예술품의 탄생이 '안나'의 조상이 트럼프 카드를 판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걸 소설로 풀어낸다. 그렇게 작가는 굉장히 사사로웠던 일의 위대한 의미가 시간이 지난 후 타인에 의해 밝혀질 수 있다며 독자를 설득한다.

   

    영화나 책, 미술품 등을 볼 때 작품의 의도를 생각하곤 한다. 내가 생각한 주제가 창작자의 의도와 완전히 일치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창작자와 관객이 같이 주제를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라 생각한다. 때론 창작자도 의미를 모른 채 그저 작품을 구상하고 세상에 내놓는다. 마치 어떤 이유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명처럼 말이다. 아직은 알 수 없는 내 삶의 의미와 생명의 의미, 그리고 인류 지성의 의미를 해석해 줄 멋진 관객이 작가의 주장대로 언젠가 등장하면 좋겠다. 스스로 삶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도 가치 있지만 때론 타인이 더 핵심을 찌르기도 하니 말이다. 그가 들려줄 해석이 무척 궁금하며, 그 해석을 직접 들을 수 있는 행운이 따르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높은 확률로 난 내 삶에 대한 평을 직접 들을 순 없을 것이다. 백악기 말 엄청났던 운석 충돌을 멀뚱멀뚱 바라봤을 '뾰족뒤쥐'를 생각해 보자. 그 뾰족뒤쥐는 그 충돌이 '공룡 멸종과 포유류 번성'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라는 인간의 해석을 듣지 못하고 지구를 떠났다. 뾰족뒤쥐의 머나먼 사촌인 나도 그렇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행운을 바라본다. 우리는 엄청난 우연의 고리를 뚫고 삶이란 티켓을 거머쥔 재수 좋은 행운아들이니 말이다. 때론 관객만이 의미를 찾을 수 있으니, 그 미래의 관객이 내 인생에 대한, 그리고 인류 지성에 대한 멋진 감상평을 남겨주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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