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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서윤 Jul 06. 2023

표류하기: 나의 흐름

나는 누구인가?

*윤이형 작가님의 <쿤의 여행> 스파이크 존즈 감독님의 <존 말코비치 되기>를 감상 후 쓰는 에세이입니다.


    외국에 가는 걸 좋아한다. 다른 언어, 다른 풍경, 다른 문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단순히 세계가 넓어진다는 느낌이 아니다. '외국에서의 나'는 '한국에서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한국에서와 완전히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그 사회에서 내가 가진 위치는 한국에서 살면서 얻은 위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로테가 통로에 들어갔다 나온 후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게 됐어. 지금까지의 나는 내가 아니었어. 진짜 내가 누군지 알게 됐단 말이야."라 말한다. 외국에 있으면서 '이전의 나와 다른 내'가 되어봄으로써 나는 내가 누군지, 무엇을 바라는지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됐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나'와 '외국에서의 나'는 무엇이 다르기에 나는 이 둘을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여겼던 걸까? 또한 '한국에서의 나'와 '외국에서의 나' 중 무엇이 보다 '진짜 나'에 가까운 것일까? '한국에서의 나'는 스스로에게 상당히 가학적이었다. '한국'이란 사회가 나를 끝없이 압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장 누릴 수 있는 자유보다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책임들이 나를 끝없이 재촉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사서 고생했다 싶다. 스스로에게 가학적이었던 건 내가 이전부터 계속해서 '쿤'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쿤의 여행>에서 '쿤'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욕망하고 바라는 존재를 연기하기 위한 가면일 수도 있고, 힘겨운 삶의 무게를 피하기 위해 내세운 대리인일 수도 있다. <쿤의 여행>에 '내 겉모습을 취하고, 내 명령에 복종하며, 내 역사를 공유하고, 나 대신 추해지면서, 그러니 실은 쿤이 나를 빨아먹은 게 아니라, 내가 쿤을 취하고 사용하고 버린 것이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경험을 한다. 즐거운 경험일 수도 있고, 대단히 슬픈 경험일 수도 있다. 때로는 그 슬픔이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러한 상처로부터 내 겉모습을 취하고, 내 명령에 복종하며, 내 역사를 공유하고, 나 대신 추해질 '쿤'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상처받기 싫기에 상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을 욕망하고 상처가 불가피해 보일 때는 상처를 대신 받아줄 대리인을 내세운다. 이 모든 것이 '쿤'이다. 그렇기에 나는 '쿤'이었다. 지금까지 나의 기쁨, 슬픔, 자유, 그리고 의무를 위해 산 것이 아니라, 미래의 내가 누릴 기쁨, 슬픔, 자유, 그리고 의무를 위해 살았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돌이켜봤을 때 '괜찮은 인생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을 살길 원했다. 그렇기에 항상 삶의 기준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있었다. 나는 '미래의 내'가 가진 혹은 가지게 될 상처들을 대신 겪어주는 '쿤'이었다.


    처음으로 외국에서 나는 나 자신을 '쿤'이 아닌 나 자신으로 느꼈다. 한국 사회에서 '나'라고 믿어지던 무수한 껍질들이 외국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외국에서 나는 그냥 혼자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동양인이었다. 물론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기에 그들도 나를 보며 자기들 나름대로의 평가를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고, 때문에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한 외국은 한국과 풍경 자체가 달랐다. 나를 압박하던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풍경은 없어지고, 이국적인 풍경만이 펼쳐질 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이기에 그들은 내게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회에 속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나는 내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외국에서의 나'는 '한국에서의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외국에서 나는 정말 온전히 현재 나의 감정과 자유를 위해 살았다. 슬프면 그냥 길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고, 기쁘면 동네가 떠내려 갈 것처럼 웃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갔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었다. 싸우고 싶으면 싸웠고, 친구가 만나고 싶으면 그냥 옆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들이란 생각에 한국에서는 쉽게 못하는 일들을 마음껏 했다.


    그렇게 살다가 갑자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에서의 나'와 '한국에서의 나' 둘 중 무엇이 더 '진짜 나'에 가까운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한국에서의 나'가 보다 '진짜 나'에 가깝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순간, '외국에서의 나'는 연기가 되는 것 같았다. 오히려 미래의 나를 위해 원하지 않는 것들을 꾸역꾸역 감내하며 성실한 척 연기하고 살아간 것은 '한국에서의 나'인데 말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로테가 말했듯이 '외국에서의 나'라는 새로운 존재가 된 이후, 내가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지금까지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나는 정말 나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 사실을 깨달은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기에 여전히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믿었던 때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진짜 나'에 다가갔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전과 다르게 나 자신에 대해 보다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되었고, 스스로를 제대로 모름을 인정하게 되었다. 덕분에 나 자신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싫어!'라고 생각하며 피했을 일들도 '좋아할지도?'라 생각하며 시도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을 잘 모른다는 걸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진짜 나'에 더 다가가게 되었다.


    '진짜 나'는 아마 명확한 단어로 정확하게 정의될 없는 개념일 것이다. 애초에 '진짜 나'를 정의해야 하는 나부터가 '진짜 나'가 무엇인지 모르니 말이다. 어쩌면 '진짜 나'는 일련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에 대해 다 안다고 믿었던 그 시절의 나부터,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했던 외국에서의 나와 그를 통해 무언가를 깨달은 지금의 나까지, 이런 변화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의 모습이 '진짜 나'가 아닐까? 물론 이런 생각조차도 한낮 허우적거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전의 어떠한 나보다 '지금의 나'가 좋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나'를 만나게 될 생각을 하면 설렌다. 


    삶은 매 순간이 새롭다. 매 순간순간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날들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 것 같지만 그날의 날씨, 냄새, 마주치는 사람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고, 내일의 나 역시 지금의 나와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불확실성을 안고 표류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아무것도 명확하게 알 수 없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런 불안감 속에서 나 자신을 찾기란 힘들다. 하지만 표류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나 자신'임을 깨닫고,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는다면 자기 자신을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앞으로도 열심히 표류하기를, 자신에 대한 부담감을 열심히 내던지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며 '진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안 하려고 한다. 왼쪽 할머니가 말했듯이 고생하는 거랑 크는 거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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