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이 좁다란 방구석에 놓인, 희스무레한 냉장고가 오늘따라 눈에 띈다. 그 옛날,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단칸방의 작디작았던 냉장고가 눈에 아른거린다. 반지하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밤늦게까지 일하시던 어머니의 모습. 희미한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불량부품을 새벽까지 분류하고 납품하셨던 그 방이 떠오른다. 친구들과 노는 대신 어린 동생을 돌보아야 했던, 바퀴벌레가 가득하고 벽에는 곰팡이가 슬었던 팍팍하고 시들었던 삶이 밀려든다. 나는 그러한 곳에서 자라났다. 삶과 힘겹게 사투하던 어머니의 피와 생명을 받아 태어나고 자라났다.
그때의 불안했던 삶을 떠올리자 하이얀 접시들이 선명히 떠오른다. 날카롭고 차가왔던 접시들. 그 접시들이 공중을 부양하며 이리저리 나뒹굴었던 정경의 날카로운 파편이 튀어 얼굴을 스치고 새빨간 물감이 얼굴과 옷들을 알록지게 한다. 그곳에서 어렸던 나와 동생을 데리고 대피하셨던 어머니.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반찬들이 저 희수무레한 냉장고 안에 빼곡히 담겨있다. 새하얬던 접시들의 모습 속 부엌의 정경이 따라온다. 그 어두컴컴한 수렁 속에서 빠져나와 환한 햇살이 밀려든다. 풍경은 급변하고, 으리으리하고 번쩍번쩍한 냉장고가 내 눈앞을 가득 채운다.
냉장고 옆 고풍스러운 흰 대리석 식탁이 눈에 띈다. 식탁조차 없었던 그때와는 달리 모든 것이 찬란하고 화려하다. 식탁 위에는 흰 접시에 된장찌개가 담겨 있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된장찌개에는 흰 두부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부드럽고 포근해 보이는 그 두부에는 너무나 따스한 어머니의 손때가 담겨있다.
온갖 모진 풍파 속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고, 내 손을 꽉 붙들고 앞서가시느라 굳은살이 잔뜩 배긴, 그 하이얀 손이 선명히 떠오른다. 언제나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물샘을 파헤치는, 딱딱하고 거칠지만 세상의 그 어떤 손보다도 부드러운 하얀 손이다.
그러한 어머니의 손에 새하얀 페르시안 고양이가 올라탄다. 우리 집의 막내라는 뜻에서 “(막)둥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던, 어쩌면 그 귀티 나는 품종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토속적인 이름을 지닌 그 고양이가, 어머니의 딱딱한 손 속에서 재롱을 부린다.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맺힌다. 제발 고양이를 키우자고 애원하는 동생에게 매몰차게 거절하던 어머니의 단호했던 얼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얼굴이다. 고양이를 키울 여유도, 공간도 없던 그곳과는 많이 달라진 이곳의 모습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창밖으로 집들이 내려다보이는 새하얀 고층 아파트.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던 너무나도 낯선 그곳에 서있는 내 모습이 너무나 낯설다. 역시 칙칙한 세상에 찌든,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페르시안 고양이가 내게 다가와 얼굴을 비벼댄다. 그 따뜻한 온기는 이 세상에서 내게 더욱더 괴리감을 준다. 모두가 살을 부벼대며 낑낑대며 잠들었던 그 어두운 단칸방에 있어야 할 내가,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세련된 아파트에서 페르시안 고양이와 나뒹굴고 있다니.
고개를 돌리자 새하얀 종이가 눈에 띈다. 새빨간 호랑이 마크가 멋들어지게 새겨진 그 종이에는 “입학허가 통지서”라고 적혀있다. 기나긴 인고의 시간 끝에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게 했던 그 종이. 하도 많이 만져서 손때가 번질번질한 그 종이가 갑자기 한없이 낯설어진다. 저 종이에 새겨진 이름이 다른 사람의 이름처럼 느껴진다. 갑자기 믿기지가 않아서 그 종이를 다시 집어 들곤 한 번, 두 번, 다섯 번, 열 번. 계속해서 다시 읽어본다. 거기에 적혀있는 이름이 내 이름임은 틀림이 없다. 그때 날카로운 자동차 경적 소리가 울린다. “빵! 빵!” 번쩍번쩍한 신식 자동차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방금 뽑은 차인 듯 새하얀 그 자동차의 자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눈이 멀 듯하다. 창문이 열리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나의 기억 속 늘 굳어있던 어머니의 얼굴이 아닌, 번들거리고 화사한 아름다운 중년 여인의 얼굴이 언뜻 비치인다. 여인의 입이 열리고 얼른 타라는 말이 뒤따른다. 나는 다른 세계의 풍경인 듯 그 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한다. 내가 손을 뻗어 그 차에 맞닿는 순간. 그 새하얀 차가, 그 늠름한 차가 허름하게 늙어버릴 것 같아서.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한다. 늘 어머니의 새 차는 그랬다. 새 차 특유의 냄새는 언제나 낯설었고 멀미가 나게 했다. 나는 너무나 속이 답답해져서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어 가쁘게 숨을 몰아쉬곤 했다. 이제는 10번을 넘게 탔는데도 늘 이 차는 불편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편안히 달리는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자는 둘째 동생과, 무선이어폰을 꽂고 유튜브에 빠져있는, 우리와는 성이 달랐던 막냇동생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막냇동생을 보면서 나는 다시 새하얀 종이를 떠올린다. 이제 그 종이는 “합격 통지서”와는 다른 내용의 글자로, 새카만 잉크가 새겨져 있다. 가정법원에서 나온 그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장청명의 개명을 승인하며, 남궁청명으로 성본변경을 허락함.” 정들었던 어두컴컴한 단칸방과 같이, 나의 낡은 이름은 떠나갔다. 이제 그릇은 더 이상 날아다니지 않고, 옛날과는 다른 아버지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다. 번쩍번쩍한, 마치 흰색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것 같은 나의 새 이름을 뒤로하고 방을 나간다.
늦은 밤 새하얀 달이 은은히 밤하늘을 수놓는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저 달은 한결같이 같은 자리에 있는데, 내게는 그 의미가 달라졌다. 그때는 저 달을 보며 저주의 말을 퍼붓곤 했다. “다 보고 있지? 그래 왜 나를 태어나게 해서 이런 고통 속에 처박아둔 건지 내가 반드시 따질 거야.” 이 빌어먹을 삶이 끊어지는 날 네놈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며 내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다 갚아줄 것이라고. 그렇게 씹어 뱉듯 바라보았던 그 달이 이제는 내게 잔잔히 미소 짓는다. 저 역겨운 미소가 푸근하게 느껴질 것이라고는, 결코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됐다. 삶이란 건 참 알 수가 없구나 생각한다.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내 비참한 운명을 되뇌며 저주받은 오발탄 같은 삶을 돌아보는 행위였는데, 지금은 나의 여유를 실감하는 행위가 되었다. 저 달의 모습이 변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최 아직까지도 이 삶을 온전히 누리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그땐 왜 그리 힘들어야 했는지. 그리고 지금의 삶은 그런 보상인 건지.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달을 보며 그렇게 다시 생각을 정리하던 찰나, 달 아래로 정겨운 얼굴이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여쁜 얼굴이다. 진흙 속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개천에서도 용은 난다고 했던가. 그딴 건 다 허황된 각본일 뿐이라고 욕을 하며 키보드를 두드려대던 내 모습이 겹쳐지다 점차 희미해진다. 이제는 지난했던 그때의 삶을, 찬밥처럼 방에 담겨 배춧잎 같은 발소리를 기다리며,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내 유년의 윗목을 보내주어야겠다.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의 기억들이 저 희스무레한 냉장고 위에 겹쳐 어우러진다. 나는 다시 혼자 사는 나의 방으로 돌아와, 어두컴컴했던 내 유년의 윗목 속 단칸방과 번쩍번쩍한 새하얀 지금의 나의 삶을 돌아본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그 하얀색 물체들로 이어진 기억들을 담담히 정리하며 온기가 섞인 한숨을 내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