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씹어 볼수록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었다. 내게 울리는 불안경보는 재난문자 같았고, 잠을 번쩍 깨게 만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뉴스 같았다. 불금에 본 <인사이드아웃 2>가 너무도 공감되었던 건, 그래서였을 거다. 불안이가 나를 감쌀 때, 심장이 너무나 쿵쾅거려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웠고 내 신념을 버려가며 나를 계속 망쳐갔다. 단 한 차례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내가 다섯 살 무렵, 엄마는 술을 달고 살았다. 술냄새를 풍기며 눈이 풀린 엄마를 보면 너무나도 걱정돼서, 그 꼬마가 뭐를 안다고 엄마를 위로했었다. 소리 지르던 아버지와, 날아다니던 그릇들. 어머니의 피부는 도화지가 되어 온갖 물감들이 번져가곤 했다. 외가 쪽 식구들은 늘 나를 볼 때마다,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기우야,,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지 알지? 네가 엄마 잘 보살펴야 한다. 네가 이 집의 가장이야."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조기교육을 야무지게 받은 셈이었다.
눈치만 빨랐던 어린애는 그때부터 어른아이였다. 마음과 몸이 따로 놀아서 스스로를 할퀴곤 했다. 철이 없는 줄 알면서도, 돌봐야 할 동생들을 내버려 두고 한눈을 팔았고 그러는 새 동생들은 다치기도 했다. 집안의 보물이었던 막냇동생이, 치우는 걸 깜빡했던 사다리를 기어 2층 침대에서 번지점프를 강행한 때는, 내가 교회 수련회를 갔을 무렵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나 되었을까, 부모님의 성난 전화를 받고 놀란 마음을 추스를 틈도 없이 달려온 쪼그마한 아이는 새아빠의 꿀밤을 사정없이 맞아야 했다. 아빠는 씩씩대며 분을 참지 못했고, 엄마는 너 때문에 우리 다 쫓겨나게 생겼다고 곡소리를 했다. 얼굴이 새하얘져 불안에 떠는 엄마의 얼굴은 어린아이의 기억 속에서, 엄마와 함께 나뒹굴던 술병들을 떠오르게 했다.
어린아이는 소년이 되었다. 아니, 소년도 건너뛰고 어른이 되기로 했다. 동생들에게서 눈을 한시도 떼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되뇌었다. 그러다 정말 찰나였다, 소년의 결심이 흔들린 건. 잠깐 한눈 판 사이, 침대에서 장난치던 둘째가 막내를 밀쳤고 막내는 다시 한번 머리가 깨졌다. 언뜻 비치는 새빨간 선혈은 소년의 가슴을 다시 한번 유린했다. 이번에도 동생의 아픔은 집안의 아픔이 되었고 소년은 죄인이 되었다. 책임의 무게는 중력이 되어 소년의 영혼을 단단히 내리눌렀다.
맏이는 둘째를 훈련시키기로 했다. 둘째가 막내와 조금이라도 위험한 장난을 치는 순간,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디서 배웠는지, 소년은 둘째에게 엎드리게 하거나 앉았다 일어나를 시키면서 둘째의 안일한 정신을 개조시켰다. 세 남매의 관계도 그렇게 개조되었다. 막내는 비로소 안전해졌다. 아무도 그와 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외로워졌다. 그에게 동생들은 짐덩이뿐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말을 접고 속으로 삭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녀의 말은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가정은 마침내 평화를 되찾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소년이 어른이 되고 청년이 되어도, 그의 역할은 달라지지 않았다. 잘못은 곧 죽음이란 믿음은 더욱 굳어졌고, 버림받지 않으려 애썼던 정신은 예민했다. 소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집안의 평화를 수호해야 했다. 감정들을 지하 깊숙이 가둬놓고, 불안에 잠식되어 살면서도 그 공허함이 어른의 징표라고 자부하며 살아갔다.
언젠가부터 소년은 뒤틀린 내면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공격도 당하지 않았는데 방어를 준비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비하는 습관이 점차 모난 가시들을 주변에 퍼뜨렸다. 이제야 드디어 진정한 파수꾼으로 거듭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스스로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을 사실로 만들고, 그럴 줄 알았다며 냉소 짓는 날이 빈번해졌다. 너무나 소중해서 잃을 게 걱정되자, 첫사랑의 인연을 잘라내는 것조차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상대가 나빴다며, 어차피 떠나갈 사람이었다고 비웃으면서. 이번에도 난 스스로를 잘 지켰다고 웃으면서도 왜인지 초라해지는 자신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그렇게 집안의 평화를 지켜냈던 최고의 파수꾼은 불현듯 그 안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흐려져가는 시야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스스로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파수꾼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고되고 말았다. 가족을 수호하는 대가로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