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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 May 18. 2019

트리니다드

기억속 거리

아바나에서 3일을 보내고 콜렉티브 택시로 트리니다드로 향했다. 아바나에서 4시간이 넘는 거리. 운전수는 여자친구인 듯한 젊은 여인을 옆에 태우고 웃고 떠들며 엄청난 속도로 밟는다. 아스팔트가 아닌 도로라 바닥에 닿는 면이 온몸으로 느껴져 허리가 장난아니게 아팠다. 며칠 후 이길을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그래도 끝없는 초원과 샛파란 하늘을 맘껏 본다는 위안으로 참는 수 밖에. 창밖 풍경은 인상파 화가 알프레드 시슬리의 가을 하늘 풍경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놓치고 싶지 않아 연신 셧터를 누르면서 문득 그가 그린 하늘 속 하얀 구름의 풍경도 이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 일거라고, 카메라로 순간을 바로 담는 것과 화가가 그리려는 색과 이미지는 기억속 그리고 현실의 풍경을 함께 담아내려 했던 것일까 생각하면서.

끝없이 펼쳐진 사탕수수밭, 카리브해의 햇살과 바다빛은 고단했던 노동자와 어울리지않게 찬란한 빛이어서 슬픔마저 돌았다.

아바나 카사 주인이 소개해 준 트리니다드 숙소,성수기가 아니라 여기저기 다른 집들을 둘러보고 고를 법도 했지만 몸이 피곤하니 다른 데 알아볼 것도 없었다. 부엌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에 짐을 바로 풀어 드디어 라면이든 밥이든 트렁크에 싸온 먹거리를 해 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피곤함이 싹 가셨다.

쿠바인들은 음식의 맛보다는 식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는지 정말 입에 맞는 음식이 없었다. 어쩌면 세상의 보편적 입맛에 길들여진 내 입맛 탓 일수도. 여행지의 현지 음식을 곧잘 먹는 편인데도 이상하게 쿠바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이들이 주로 먹는다는 흰밥에 소고기 덮밥은 우리 입맛과는 완전 동떨어진 질기고 짠 게다가 밥알은 까칠까칠 날아간다. 배부르게 먹고 싶다는 욕망이 간절했지만 시도하는 음식마다 실패, 아바나에선 화덕구이 피자만 연일 먹어댔었다. 게다가 아바나 숙소는 부엌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좀 불편했는데 여기서는 우리집처럼 맘대로 쓰라고하니 이게 웬 횡재인지.

트리니다드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주택과 건물등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바나보다 훨씬 소박하고 작은 마을 느낌이 나는 소도시. 마부가 끄는 마차, 어른이고 아이이고 말을 타고 거리를 지나는 모습을 수시로 볼 수 있다. 울퉁불퉁 반질반질 윤이나는 돌길 위로 새벽이면 말발굽 소리가 잠자는 귀를 두드린다.

돌바닥을 다그닥 다그닥 싫지 않은 소리다. 뒤이어 이른 새벽부터 무엇인가를 파는지 목청 좋은 남자가 골목을 돌아다니며 부르짖는다. 닭도 울고 집집마다 대문 위에 매달아 놓은 새장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아이들 소리도 들린다.

아침을 여는 소리에 일어나 마이요 광장으로 가는 산책 길. 광장 성당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은 길들은 어느 길로 가도 광장이 나오게 되어있다. 매일 다른 길로 가면서 만나는 골목의 집들은 색채의 향연이다. 햇빛은 골목마다 가득해서 지붕이고 대문이고 안채까지 스며들어 환하게 비춘다.

집집마다 등나무 의자와 흔들의자가 작은 거실을 차지하고 뒤이어 부억과 침실이 보인다.

소박하고 작은 집들이 있는가 하면 높다란 대문을 열면 널찍한 안채에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고 대가족이 사는 구조로 둥글게 방들이 이어진 곳도 있다. 스페인 전통집과 비슷한 구조, 작은 집이든 큰 집이든 깔끔하고 정갈하다.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세간살이와 옛 것들을 자랑스럽게 지니고 대를이어 사용하는 그들의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투박하나 대대로 손이 탄 접시며 우윳빛 그릇들, 커다란 플라스틱 보온 물병, 어릴적에나 보았던 전기 호일 쿠커가 새로웠다. 쿠바인의 자존심인 수십 년 된 올드카를 그들은 늘상 클래식 카라고 부르듯이 옛 것은 그들에게는 목숨과도 같다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오늘도 인터넷 카드 번호를 입력해서 마이요 광장 계단에 앉아 잠시 문명과 접속을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확인하다.

접속하는 순간 이전의 세상이 펼처지고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마법처럼 다시 지금의 여기로 돌아온다. 여행객들도 광장계단에 나란히 앉아 저마다의 세상과 소통하고 돌아오기를 매일 반복한다.

느릿느릿 카사로 걸어 돌아오는 길, 학교가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른 아침 풍경은 어디나 똑같은 걸까. 엄마 손을 잡고 한 손에 도시락 가방을 든 교복을 입은 아이들, 바쁘고 소란스러운 이런 아침 풍경이 문득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것만 같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카사 주인은 연신 스페인어로 설명하며 낄낄댄다. 내가 알아 듣건 말건 오직 스페인어로, 가끔 내가 아는 스페인 단어를 툭툭 내던지듯 말하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며칠 익숙해지니 둘다 다른 말을 해도 까끔은 찰떡같이 알아 듣기도 한다.

형형색색 정성스러운 아침상, 망고와 바나나 몇 조각,파파야로 시작해서 모카 포트에 내린 커피와 햄과 치즈를 넣은 간소한 빵, 스크램블, 오이 두 조각, 소꿉놀이같은 아침삼, 먹고나면 든든하고 행복하다.

오늘은 4월 셋째 주 금요일 부활절. 저녁 무렵 흰 옷을 입은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있는 성당으로 향한다. 가족 혹은 친구들, 연인들과 손을 잡고 축제라도 가는 것처럼 들썩이고 광장 입구부터 여행객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인 듯 시끌벅적하다. 성당 안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예수상 앞에 무릎을 꿇고 두 발에 입맞춤을 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성스러운 순간이자 축제날 이기도 한 날, 다들 성모상과 예수상에 손끝이라도 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인다. 미사가 끝나고 이어서 마리아와 예수상를 든 신자들이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성가를 부르며 행사를 마무리 한다. 계단에 앉아 바라보는 모든 풍경,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트리다드의 하늘이 오늘 하루와 어우러진 멋진 날이다. 이들에겐 늘상있는 날 중의 하나이겠지만 내겐 특별한 날이고 잃고 싶지 않은 나만의 기억이다.

굳이 무얼 하지 않아도 하루 하루가 기분좋게 흘러간다. 어슬렁 골목을 걷다 모르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끔 카페에서 노래하는 가수들 노래 들으며 함께 어깨를 들썩거리며 흥겨움을 나눈다. 뼈속깊은 그들의 리듬과 흥겨움이 내게 전염되는 것만 같다. 내게 남은 날들도 그렇게 리듬을 타며 사는 날이 되기를 바래본다. 이들처럼 느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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