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테리 Sep 24. 2021

그날 밤 우린 홍콩을 갔다

D-15. 홍콩 여행 2주 전.

작품 감상하기를 즐겨하는 그녀를 위해 ‘홍콩 아트페어’ 기간에 맞춰 여행을 기획했다.

항공권을 확보하고 호텔을 예약하고 가봐야 할 곳 등을 리스트업하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 때 치명적인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철저하게 2만 프로 나의 잘못 때문에...


살면서 그렇게까지 다리가 후들거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룻밤의 시차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빌고 또 빌고 다시 비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그 유일한 한 가지가 통했다. 길고 긴 속죄와 회유를 거친 끝에 홍콩발 비행기를 취소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단, ‘이별 여행’이라는 슬픈 꼬리표가 붙었다. 그렇게 우리는 ‘잠정적 이별 커플’의 신분으로 홍콩 땅을 밟았다.


4박 5일의 시간 동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했는지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사랑이라 부르기에도 숨이 차올랐던 너와의 기억을 허무하게 시간 결에 흘려버린 지금에 와서야 기록하지 않는 행위는 죄악임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여행을 떠올리며 또 너를 내 첫 번째 기억 선상에 올려놓은 이유는 ‘이별 여행’이 이별로 이어지지 않고 유예가 된 내 인생 최고의 감사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뭐랄까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느낌이었달까?...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맞춰주리라’ 단단히 다짐을 하고 떠났건만 그 짧은 5일의 날들에도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불변의 플롯이 존재했다.


내가 꼭 가보고 싶어 했던 카페가 있었는데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거기 아이스크림을 먹고 오지 않는다면 홍콩을 맛본 것이 아니다. 뭐 이런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문구에 현혹된 나는 여기는 꼭 가봐야겠다고 피력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동선과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기에 그녀는 카리스마 있는 눈짓으로 포기할 것을 종용했지만 나는 그녀의 눈빛을 피한 채 여기는 꼭 갔으면 좋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내 바람대로 그 카페에 갔고 커피와 디저트와 아이스크림을 먹었지만 그녀의 말이 맞았다. 별 게 없었다. 이 정도 맛은 이태원을 가도 충분히 맛볼 수 있는 맛이었다. 이런... 망할 블로거 자식.


여행을 가서 한 가지가 틀어지면 그 한 가지는 이미 한 가지가 아닌 게 된다. 기회비용이라는 것이 있고 한 끼를 맛없게 먹는다는 것은 다른 맛있는 한 끼를 경험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아무리 많은 핫플을 검색하고 가더라도 우리는 반의 반의 반도 경험하지 못한다. 여행자라는 것은 낯선 곳에서의 시한부 인생 같은 존재니까... 시간도, 돈도 한정되어 있기에 순간순간의 선택과 대처가 흥망성쇠를 결정한다. 나는 이미 한번 초이스의 실패를 맛보았기에 모든 초이스의 전권을 그녀에게 넘겼다.


남자가 죽어야 여자가 산다. 여자가 살아야 우리가 존재한다. 이후로는 평온한 시간이었다. 배우 이정재 님을 우연히 봤던 중식당에서의 딤섬도 좋았고, 어느 타파스 바에서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였던 시간도 좋았고, 뷰가 좋았던 루프탑 바에서 카메라 프레임으로 봤던 네가 좋았고, 예정에 없었던 마카오에서의 하룻밤도 좋았다. 우리가 가보고 싶어 했던 대부분의 식당은 몇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했던 관계로 다음을 기약해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사실, 다투지 않는 너와의 모든 시간이 좋았다.     


누군가는 길을 잃어야 그때부터 진정한 여행이 시작되는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잃었던 길을 다시 찾을 수 있어서 감사한 여행이었다. 여행으로 회복된 관계가 훗날 여행으로 깨진 것이 아이러니로 남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때 너와 여행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


함께 했던 그 시절이 떠오를 때면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확인할 수 있으니까...    

한때는 나도 행복했던 사람이었다는 걸...    

작가의 이전글 나는 오늘 나를 죽이러 갑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