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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Sep 26. 2022

이집션과 낙타라는 짐승

여행의 이유

"당나귀처럼 비틀거리고 백조처럼 목을 움직이는 이 묘한 짐승은 암만 봐도 물리지 않습니다."
"낙타들이 병사들처럼 한 줄로 서서 지평선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모습을 한번 보셔야 합니다.
 타조처럼 고개를 쭉 빼고, 끝도 없이 가지요, 끝도 없이......"


이집트 낙타의 이국적 정서에 대해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남긴 말들이다.

플로베르는 이집트에 가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들을 이렇게 나열한다.

: 피라미드, 카르나크의 신전, 왕들의 계곡, 카이로의 무희 몇 명...... 그리고 그중 진짜 좋아했던 것은

바로 낙타라고.


프로베르가 이집트 여행을 갔을 때, 낙타에게 느낀 이국적 정서에 대한 감정을 저렇게 멋지게 표현 할 수는 없지만, 나는 낙타를 만나고 나서야 이집트 여행의 이유를 찾았다.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처음 낙타를 마주했을 때, 나는 겁부터 났다. 막상 낙타 앞에 서고 보니, 나보다 너무 크고 성질이 꽤나 사나워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을 태워야하는 낙타가 불쌍하다는 생각따위는 할 세도 없었다. 낙타 주인은 낙타의 불편한 심기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여행객 앞에 성급하게 낙타의 무릎을 꿇렸다.

'얼른 낙타를 타고 저 멀리 언덕배기까지 다녀와야 뒤에 기다리는 다른 여행객을 태울것이 아닌가?' 주인의 속내가 이해는 가지만, 이 힘 좋고 성질머리 고약해 보이는 낙타는 인간을 등에 지고 다니는 일은 꽤 귀찮다는듯 꼿꼿히 뻗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등에 타서 낙타의 심기를 거슬르면 무슨 일이라도 벌어 질까 지레 겁이 나는 것이었다. 노련한 낙타 주인의 손에선 언제나 굴복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가축 낙타의 운명임을 알지만, 잠시 낙타 주인의 힘을 빌려 볼 요량인 손님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피해를 당하는 낙타 눈치가 보였다.

틈만 주면 제멋대로 할 것처럼 보이는 낙타의 고삐를 바투 쥐고, 낙타의 자세를 낮춰주는 낙타주인. 낙타 주인은 달러를 팁으로 챙겨 온 여행객에게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무릎을 꿇려야하는 낙타와 자신이 무릎을 꿇고 낙타를 태워줘야하는 여행객을 대하는 태도는 엄격하게 달랐다. 이집트든 어느 곳이든 먹고사니즘 앞에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낮추게 된다.


내가 낙타를 탈 순서가 되었다. 쌍봉 낙타 등에 안착하기를 기다리며 나를 에스코트하는 낙타 주인이 다부진 팔뚝에 불뚝 힘을 주며, 낙타의 머리를 끌어 내리자, 낙타는 내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앉을 자리를 내주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뜨거운 햇볕을 막기 위해 머리에 두른 터번, 사막 어디에 던져져도 살아 남을 것 같은 낙타주인에게 이집트 사람에게만 있는 야생성 아직 간직한 인간의 강인함을 느꼈다. 하얗고 보드러운 도시인의 살갗은 사막과 확실히 동떨어져 보였다. 이집트 사막과 어울리지 않은 희고 무른 피부색을 가진 외국인에게 이집션들은 우리와 다른 이국적인 정서(?), 아마도 달러의 향기를 느낄 것이다.


자외선 차단제로 보호해 온 희멀건한 내가, 사막의 상징같은 낙타 등에 올라타려고 해서 일까, 낙타는 뜨거운 사막 위에서 맥도 못 출 것 같은 나같은 인간에게는 곁눈질도 주지 않았다. '크르렁 크르렁'거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한 껏 저항하던 낙타는 단호한 주인의 명령에 따라 털석 주져 앉았다. 나는 쌍봉낙타의 푹신한 안장

위로 털썩 올라 탔다. 낙타의 긴 다리가 순식간에 펴졌고 나는 사막 한가운데 봉긋 솟아 오른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은 신이 났다. 처음 경험해 보는 사막에서 낙타 타기. 낙타 등에 올라 타고 나서 펼쳐진 사막은 광경은 형언할 수 없이 웅장했다. 사방은 황량하고 끝이 보이지 않았고 하늘은 열려 있었다. 도화지 정가운데 수평선을 긋고 위는 하늘, 아래는 땅이라고 하면 참 심심할 것 같지만, 2차원이 아닌 3차원의 사막의 땅에 서니, 빈여백이 최선의 완벽함이라 느껴졌다. 지상 위에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었고 땅과 하늘이 모두 열려 있었다.

동서남북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뻥뚫린 사막에서 거리를 알 수 없는 저편 땅으로 나를 데려다 주는 낙타의 걸음걸이는 우울하고도 우아했다. 낙타의 우울하고 우아한 걸음으로 얼마간 사막 위를 두둥실 떠 다니는 일은

여행자인 내가 낙타의 힘을 빌려 사막을 진면목을 경험하는 찰나였다. 이런 이유로 사막에 오는 구나! 사막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순간이구나! 이 무덥고 메마른 땅이 이렇게 웅장하구나! 여행을 오기 전에 알 수 없었던 내가 사막을 와야 했던 이유를 낙타 위에서 알았다.


낙타에서 내려 오아시스의 낙타 타기 투어가 끝이 날 때 쯤이었다. 나는 낙타의 성질이 고약해진 이유와 낙타가 사막에서 도망가지 못하는 이유가 일맥상통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성질 머리가 고약한 낙타에게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자신의 등에 사람을 태워야하는 귀찮은 일을 마친 낙타는 이제 낙타가 도망갈 것을 걱정하는 주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목줄과 목의 함께 묶어 낙타의 몸통 자체가 자물쇠가 되어야 했다. 목줄과 다리의 족쇄가 함께 묶인 낙타는 우울하지만 우아하지 않은 걸음으로 절둑거리며 우리, 여행자들로부터 사라졌다.

'오아시스 근처에서 풀을 뜯어 먹은 낙타는 털석 주저 앉아 목과 발이 묶인 상태로 불편한 잠을 청하겠지.

그리고 내일 다시, 주인의 손님을 태우겠지.' 머릿 속에 낙타의 내일이 떠올랐다.

이렇게 사는 낙타의 성질머리가 고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막에서 유일한 돈벌이 수단인 관광객 앞에서, 주인이 낙타를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제 짜증을 표현하며

성질머리를 보여줘야 낙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겠는가?

주인의 제압에 굴복하는 굴욕을 맛보게 될 지라도, 낙타는 힘껏 생명력을 드러냈다. 하기 싫은 일을 대하는 낙타의 솔직함에는 본능만 있을 뿐, 인간의 처세같은 것은 없었다.  목과 발이 묶인 후, 멀리 달아 날 수 없는 절름발이 낙타만에게 허락되는 오아시스의 먹을 거리는 낙타의 본능을 누그러 트리지 못했다.


사막에서 생존이 가능하게 설계된 낙타라는 짐승은 사실 오아시스 주변을 배회하며 살 필요가 없다. 자유로이 사막을 달리다가 오아시스를 만나면 물을 보충하고 낙타 혹에 저장된 물탱크를 도시락 삼아 다시 사막을 달리면 된다. 자유가 없는 낙타가 필요한 것은 오직 낙타 주인이다. 낙타 주인이 여행자에게 무릎을 꿇고 낙타를 무릎 끓리는 일은 낙타 주인이 하기 싫은 일을 친절하게 하며 먹고 사는 방법이다. 낙타 주인은 성을 내지 않는다. 여행자가 내미는 달러가 이집트에 사는 자신을 얼마나 자유롭게 해 줄 지 알기 때문이다. 낙타 주인은 본능을 이기고 먹고 사는 일에 겸손해지는 우리 인간의 일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사실 사막에 사는 이집트 사람들은 낙타보다 더 다혈질적이며 종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베두인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성경에서부터 시작된 오래된 상식이다. 사막의 낙타처럼 성질머리가 살아있고, 강하며, 야생의 힘을 잃지 않은 인간, 검은 올리브 마냥 까만 이집션은 사막에서 먹고 살아야 하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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