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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Oct 07. 2022

한량이고 싶은 일개미

이스탄불에서 마흔둘

아침 7시 15분, 나는 평소대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남편은 오늘따라 식탁에 일찌감치 앉아서 밥을 재촉했다.


'뭔가 표정에 자신이 식탁에 앉기 전에 밥을 차려 놨어야지' 하는 짜증이 묻어나는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식사 준비가 재촉한다고 빨리 되는 것이냐?

나는 눈치껏 집에 있던 꼬리곰탕을 데워서, 김치과 함께 상을 차렸다. 아침 과일로 꺼내 놓은 아삭한 사과와 토마토 주스는 패스.


남편은 후루룩 한 술 뜨더니, 바쁜 아침에 부엌일 하는 나에게 재촉한 것이 미안했던지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쓸데없는 말을 자꾸 시킨다.


이럴 때 나는... 묵묵부답. 나한테 짜증을 부리는 사람에게, 반응해주고 상냥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남편이라면 더 더욱.


이럴 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손에 얼른 쥐어 주고, 한 시라도 빨리 회사로 내몰아야 한다.


"덜커덕~ 쿵" 하며, 남편이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배웅도 못 받고 가셨군요. 그러니까 사람이 늘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서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이번엔 아무리 봐도 귀여운, 아들램 등교 준비. 학교 밥을 안 먹는 아이를 위해 나는 매일 도시락을 싸고 있다.

이스탄불로 온 후 4년 넘게 도시락을 싸왔지만 아직도 그날의 도시락 메뉴는 내 고민거리이다.


13살. 6학년 아들은 키가 훌쩍 커서 170 센티가 넘어서, 이제 나는 아들을 올려다봐야 한다. 내가 휴직을 하고 이 곳에 처음 왔을 땐, 꼬맹이였는데... 다 큰듯한 아들을 보면 아이가 커버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아쉽다.


저렇게 커다랗지만 귀여운 생명체가 또 어디 있을까?


남편한테는 받고 싶은 마음이 큰데, 아이에겐 주고 싶은 마음이 큰 걸 어쩌나.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느낀 가장 희한한 감정, 내가 희생을 하며 쪼그라드는데도, 뭔가를 더 해 주고 싶은 마음. 우리 엄마가 나에게 내어준 마음을 알게해 준 이가, 내 아들이었다.


"엄마, 오늘은 뭐 입어?" "응, 요즘을 일교차가 크니까. 반팔티 안에 입고 집업 후드 입고 가자.

날씨에 맞게 오늘의 코디를 추천해주고 나서, 얼굴에 피지오겔과 선블록, 입술 보호용 립밤까지 듬뿍 발라주어야 등교 준비 끝.


아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쿨버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창문을 열고 아이가 잘 내려가고 있는지 살핀다.


6층 우리 집 창문 앞에 선 나를 찾아 손을 흔드는 아들에게, 나는 더 크게 손을 흔들며, 큰 하트 작은 하트를 날려준며, Bye Bye한다.


이제, 두 남자를 다 보냈다.


식구이 세상으로 나가 일하고, 공부할 수 있게, 남편 일터로, 아들 학교로,

 보내 놓고 안도하는 시간.

이제부터는 이스탄불에서 한량이 되는 시간이다.


유튜브에서 work jazz, 오늘의 즉흥곡을 찾아보니, 마음에 드는 제목이 꽤 많다.

Friday morning jazz와 positive jazz 둘 중에 고민하다가 오늘의 선택은 positive jazz.


적당한 온도로 잘 우려낸 홍차 한 잔을 들고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면, 이스탄불 한량의 세상이 펼쳐진다.


내 손때가 잔뜩 묻은 서재의 책들, 그날 기분에 따라서 책 몇 권을 골라 온다. 오늘의 pick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무라카미 라디오>다. 혜화동에 놀러 갔다가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헌책방에서 건진 보물.


하루키의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초판이 1999년인데, <무라카미 라디오>는 2001년이 초판이니까.


<소확행> 이후에 나온 하루키의 에세이집이다. 지금으로 부터 무려 20년 전 에세이지만 역시 에세이의 고전인가? 세월이 흘러도 읽을만하다.


여기에 오늘 공부할 한 단어를 찾기 위한 터키어 사전, 암기하는 것보다 까먹는 속도가 더 빠른 요즘 내 영어 능력을 보전해 줄 영어 원서 한 권.


이렇게 세 권의 책이면, 나는 아침을 한량처럼

여유롭고 만족스럽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다가 좀이 쑤셔 올 그쯤, 후다닥 10분씩 짬을 내서 청소기도 돌리고,

설거지도 해치우고, 세탁기도 돌리면 집안일의 지루함도 평온함과 섞여 조금씩 희석된다.


베짱이같은 한량을 꿈꾸지만 현실은 늘 일개미가 아닐까?


마냥 놀면 재미가 덜 하다. 중간중간하기 귀찮고 자질구레한 일도 해주면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의 발란스가 유지된다.


쓴 맛이 있어야 단 맛이 더 달게 느껴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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