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없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오! 놀라워라. 오강남 선생님의 <예수는 없다>를 보자마자 ‘센’ 제목 때문에 놀랐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기독교인이시고 오강남 선생님께서도 기독교와 인연이 깊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제목을 지을 수 있었을까? 예수 믿는 나는, 제목에서부터 감정이 복잡해졌다.
‘Christian’.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현대인의 부분집합으로 살 수밖에 없는 크리스천의 모순을 신랄하게 묘사한 Zior Park의 노래이다.
나는 <예수는 없다>를 읽으며 Zior Park의 노래를 들으며 느낀 통쾌함과는 다른 층위의 감정을 느꼈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엔 ‘예수는 없다’는 말까지는, ‘거기까지는 인정 못하는데...’와 같은 저항이 일어난 것이다.
기독교의 대속의 교리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인 예수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일단 예수가 ‘~ 있다’, ‘~없다’라는 식의 문장 자체가 낯설었다. 이 세상의 사람 중에 그 누가 예수의 존재 유무를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책의 제목은 출판사에서 짓는 다더니, 정말 책 판매 부수를 높이기 위한 전략으로 이런 불경한 제목을 쓴 것일까?
나는 대학졸업 이후 20년 만에 다시 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해외생활에 한인 교회 커뮤니티가 필요해서 이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삶은 진실하다는 나의 믿음 때문이었다. 언제나 말썽이 되는 것은 인간이지 예수님께는 죄가 없다. 인간이 예수를 팔아 자신의 영달을 취하는 것이 문제지, 예수님은 스스로의 믿음대로 사랑하며 살다 가 삶을 마쳤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라 한 적도, 부활하겠다 한 적도 없다. 다만 예수는 그의 삶으로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을 뿐이다. 이스탄불에 살면서 튀르키예 전역에 널려 있는 기독교 성지를 여행하며 교회도, 목회자도, 기독교의 교리도, 그 안에서 ‘아멘!’을 외치는 우리 기독교인도 모두가 모순적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하나, 예수님만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사이의 모순을 극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은 교회 제도나 기독교의 교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읽힌다. 유튜브를 통해 오강남 선생님의 인터뷰와 강의를 들었고 선생님께서 얼마나 높은 식견의 학자이신지, 아인슈타인의 우주론, 참된 종교의 의미, 예수님과 부처님의 공동의 외침, 동시대에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 인가? 까지 깊이 있는 가르침을 주셨다. 선생님의 기독교, 불교, 도교, 우주론을 오가는 학문의 경지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불경한 제목에도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제목에서 생긴 불편함을 한쪽에 접어두고 읽었지만 읽는 내내 제목에 대한 ‘작가의 변명’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오강남 선생님께서는 제목에 대한 우려를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책의 후반부가 되자 제목에 대한 소회를 밝히셨다. 원래 선생님이 지으신 이 책의 제목은, 성경의 시편 137장 1절 말씀에 착안해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였다고 한다. 출판사에서 제목이 수필 느낌이 난다며 임팩트가 너무 없다고 반대하자 결국 선생님께서 재고(再考)하신 10개의 제목을 출판사에 제출했는데 이 10개의 제목 중에서 출판 관계자 만장일치로 ‘예수는 없다’로 결정되었다고 했다.
이 제목에 대한 파장을 염려하신 선생님께서 ‘그런 예수는 없다’로 제목 수정을 원하셨지만 출판사 측에서 그러면 ‘김이 빠진다’고 하여 ‘그런’ 없이 ‘예수는 없다’가 최종적으로 책의 제목이 되었다는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선생님의 제목에 대한 고심과 염려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