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처럼 깡처럼
개인적으로 비는 10대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가수 중 하나였다. 모든 남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큰 키와 딱 벌어진 어깨 그리고 근육질의 몸매로 꿀렁꿀렁 웨이브를 추는 그의 모습은 남자인 내 눈에도 너무 멋있어 보였다.
내가 무엇보다 비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의 인생 스토리 때문이었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어머니를 잃고 홀로 세상과 맞서듯 죽어라 노력하며 살아왔던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 그 어떤 노래 보다도 더 노래 같았다.
하지만 화려한 만큼 쉽게 잊히는 것이 연예인이듯이 비 또한 언제부턴가 대중들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잊혀갔다. 가끔이나마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등장하는 망작 엄복동의 소개로 그의 소식을 봤지만 더 이상 그지 관심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처럼 어디서 시작됐을지도 모를 깡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 열풍이지 대부분은 촌스럽기 그지없는 노래와 춤을 향한 조롱이었다. 하지만 조롱과 재치 그 사이에서 사람들은 깡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고 그렇게 비는 밀레니얼 세대들에게 그저 깡 삼촌 정도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랬던 비가 깡을 발판으로 놀면 뭐하니의 여름 프로젝트를 통해 다시 완전히 대중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향한 수많은 조롱을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놀면 뭐하니에서 혹시 기분이 나쁘지 않냐는 유재석의 질문에 비는 말했다.
“아니요. 저는 사람들이 더 저를 가지고 놀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더 가지고 놀아줬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가지고 논다’는 부정적인 어감을 이렇게 자신에게 사용하는 게 쉬운 일인가?
하지만 그 말과 함께 그는 깡이라는 조롱거리를 실제로 놀이와 문화로 한 순간에 바꿔버렸다. 한 때 가장 인기 있는 스타의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분명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무엇인가를 이룬 사람일수록
“내가 왕년에 말이야~ 라며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며 꼰대가 되는 것을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던가?”
하지만 비는 꼰대의 길이 아니라 깡의 길을 갔다. 무엇이 비로 하여금 이 반전을 가능하게 했을까?
어쩌면 절박함은 아니었을까? 개인적인 느낌일지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괜찮다며 말하는 그의 웃음 너머에서 그의 절박함이 보였다.
한 때의 영광을 뒤로하고 가수로서도 배우로서도 조금씩 잊혀갔던 그에게 찾아온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절박함. 아무것도 없던 그를 스타의 자리에까지 오게 만들었던 그 절박함이 그를 향했던 조롱을 찬사로 바꾸게 만든 것은 아닐까?
오늘날 사람들은 절박함보다는 여유와 즐거움을 더 쫓는다. 절박한 세상에서 절박하게 살아가는 것은 더욱 불행해질 뿐이라고 말하며 그저 인생을 즐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자유와 여유라는 외침으로 절박함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그저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하기 싫은 핑계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이 시대가 여유와 즐거움만으로 산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생을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여유와 즐거움은 더욱 아닐지 모른다. 어차피 그것이 쫓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환상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절박함이라는 깡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