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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Sep 09. 2021

어디서든 시작되는

끊어진 인연은 언제든 다시 이어질 수 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죠?"

새로 발령받아 온 직장 선임 C의 첫마디였다.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이런 식의 첫마디는 좀 당황스러웠다. 나는 숫자에 약해서 번호는 잘 기억하지 못해도 (카페에서 화장실 비밀번호를 보고 화장실 가는 길에 머릿속에 저장이 안돼서 돌아온 적도 있다.) 이미지에는 강한 편이라 얼굴이나 복장 등은 잘 기억하는 편이다. 오전에 들렀던 상점의 직원이라던가,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마주쳤던 사람 등을 전체적으로 이미지화해서 저장되고 그런 이미지는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있는 편이다. 어디서 봤다 싶은 사람을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거의 기억해내며, 그 기억은 꽤나 디테일한 편이다. 그런데 나는 C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이미지를 저장하는데 특화되어있는 내 기억을 믿었기에 더욱 확신했다. 그래서 만난 적이 없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첫마디는 단지 '친한 척'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물론 같이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같은 회사를 다녔으니 어디서든 마주친 적은 있지 않을까.라고 짐작할 뿐이었고 그렇게 선임 C와의 근무는 시작되었다. 


근무를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사회생활의 시작이 늦은 편이었던 나는 후임이었지만 알고 보니 우리는 동갑이었고 (이때 의심을 시작했어야 했다.) 게다가 생일이 가까웠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에도 C와는 대화도 잘 통했고, 무엇보다 업무에 대한 태도가 잘 맞아서 함께 일하는데 합이 좋았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고 선후임 관계이면서 나이가 같다는 애매한 관계로 인해 여전히 깍듯하게 서로에게 존댓말을 사용했지만 그 사이에 많이 친해지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업무적으로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서로가 큰 힘이 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C에게 메시지가 왔다.


'혹시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초등학생 시절을 보낸 동네와는 먼 곳으로 오래전에 떠나왔고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 대해선 서로 말한 적이 없어서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동갑이긴 했지만 30대 중반에 만난 직장 선임으로부터 듣게 된 초등학교 어디 나왔냐는 질문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은 짐작처럼 느껴졌다.


'저 OO초등학교 나왔는데 왜요.....?' 

'헐'

'동창이에요?'

'어쩐지 낯이 익더라'


그렇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초등학교 이름을 시작으로 우리의 조각 맞추기가 시작되었다. 6학년 때는 몇 반이었냐, 5학년 때는 몇 반이었냐, OOO 선생님 아느냐 같은 질문에 기억을 더듬어가면 대답을 맞춰보았다. 하지만 결국 같은 반이었던 적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덕분에 같은 반이었으면 기억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고 큰소리 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C가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 자체가 너무 신기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 말없이 조용한 아이였고 그만큼 존재감이 크지 않았을 텐데 같은 반도 아니었던 C가 나를 기억하고 어디서 만난 적이 있냐고 물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그렇게 기억으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기억의 장소에서 아주 먼 곳에서 우리의 인연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회사의 구성원 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계속 존댓말을 썼다. 하루아침에 친구가 되어 반말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나았다. 그러면서도 졸업앨범에서 서로를 찾아보며 웃기도 하고, 학교 앞 떡볶이 집의 추억을 떠올렸다. 우리가 초등학교 동창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C와 함께 일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잘 이겨내며 좋은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C가 회사를 떠나고 나서야 우리는 진짜 친구가 되었다.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또 너무 다른 C와는 회사를 넘어 인생에 대한 얘기를 진지하게 나누는 사이가 되어 서로를 응원하고 걱정하는 친구의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지금은 둘 다 회사를 떠나 자주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새로운 시작 전이나 두려운 마침표를 앞두고 있을 때면 언제든 진심으로 함께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C가 과거의 기억에서 나를 찾아내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서로의 기억을 맞춰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냥 스쳐가는 좋은 직장 동료 사이로 남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친구가 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동창을 20여 년이 지난 후 직장에서 만나게 되는 일, 지워져 가는 기억 속에서 누군가를 찾아내어 친구가 되는 일, 20여 년 전처럼 다시 같은 추억을 공유하면서 인연을 이어나가는 일 그리고 파란 하늘을 보면 아무런 용건이 없어도 '오늘 날씨 참 좋다'라고 연락할 수 있는 친구를 갖게 되는 일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별한 계기가 없더라도

시간이 흐르거나, 가치관이 바뀌거나, 상황이 변하면

자연스럽게 누군가와의 관계도 끊어진다.

하지만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매듭이 묶여 다시 연결되기도 한다.

끊어진 인연은 언제든 다시 이어질 수 있다.

지금 끊어져가는 관계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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