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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Oct 20. 2023

과거의 증명

시간을 증명해야 할 순간이 있다.

과거를 증명해야 할 순간이 있다.

하지만 기억은 완전하지 못하고,

추억은 오래도록 남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기억에서 사라진 시간은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시간을 증명하는 방법은 다 다르겠지만

나는 기억을 보관하고, 지나간 시간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물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의미가 부여된 수많은 물건들을

여전히 이고 지고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전혀 쓸모가 없는 꽤 다양한 물건들이

버려지지 않은 채, 어딘가에 항상 보관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물건들은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가

어떠한 계기로 그 물건을 발견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오래된 먼지를 털어내며 기억과 함께  떠오르긴 하지만

그건 나의 기억이, 추억이, 기록이 그리고 내가 부여한 의미가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잘 보관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에 마음 놓고 기억을 지웠달까.

그 의미를 모르는 다른 사람은

‘도대체 그런 걸 왜 가지고 있느냐’고 말할 법하다.

나였어도 그렇게 말했을 만한 사소한 물건들이니까.


나는 물건에 기억을 저장한다는 것을,

그렇게 의미가 부여된 물건들은 잘 버리지 못하는 것을,

그리고 그런 물건이 다른 사람에 비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오래간만에 짐 정리를 하면서 새삼 느꼈다.

미니멀한 집들을 보면 너무 깨끗하고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런 건 어디다가 보관하지?’, ‘저런 건 어디다가 보관하지?’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렇게 ‘보관’해야 할 것들이 나에겐 많았던 것이다.

미니멀하게 사는 사람들 보면 쿨하게 잘만 버리던데,

나는 왜 그게 어려운지 잘 모르겠다.

더 이상 쓸모 없어진 물건을 버리려고 손에 들었다가도

‘추억’이라고 까지 하기에는 민망한,

소소한 기억들이 떠올라 망설일 때가 많다.

‘미니멀리즘’이나 ‘단출’ 같은 단어와는 절대 친해질 수가 없을 것 같다.


물론 기록이라는 방법도 대안이 될 수 있겠지만

전자화된 기록은 언제나 사라질 위험을 가지고 있고 (일단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것들이 우연히 발견되어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전자화든 아니든 기록이라는 것도

결국 기록된 무언가를 보관해야만 하는 것이다.

부피는 차이가 있겠지만.


이번에 묵은 짐들을 많이 정리하고 버렸다.

특히 어떤 시기에 많은 노력과 열정을 쏟았던 것들을 모두 버렸는데

‘필요’라는 목적 아래 많은 기억과 의미들을 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참 묘했다.

그것들이 지금 현재의 가치로는 쓸모없는 물건일지 몰라도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지나간 시간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내 인생의 어떤 부분이 다 삭제되는 듯한 허무한 기분이랄까.

그 시간의 노력과 열정을

나 스스로에게조차 증명할 길이 없어진 듯해서

여전히 서글픈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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