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hy not Cuba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icia Jun 26. 2020

그는 내게 '호의를 조심하라'고 말했다

02. 걱정인형의 쿠바 입성기

걱정인형이 되어버렸다.

쿠바 땅을 밟기 위해서는 무려 두 번의 환승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인 것도 힘든데, 그걸 두 번이나 해야 한다니. 게이트를 잘못 찾으면 어쩌지? 터미널을 이동해야 하면 어떡해? 지금 생각하면 실소밖에 안 터지지만, 그땐  심각했다. 일단 영어를 못해도 너무 못했고, 외국인(특히 서양인) 울렁증이 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여행 생각을 했냐고 물으면  말은 없지만.


일본(나리타)과 캐나다(토론토)를 경유해 쿠바(아바나)로 입국하는 여정이었다. 나리타공항에서는 큰 어려움 없이 환승을 했다. 한국어에 능숙한 에어캐나다 직원 덕에 탑승권 발급도 수월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가 문제였다. 입국심사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승 시에는 입국 심사가 없다는 블로거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게다가 캐나다는 입국 심사가 까다롭다고 들었는데, 나 괜찮은 거야?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행히 우려한 것 치곤 괜찮았다. 질문과 답변이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디서 머물 거냐는 질문에 '호스텔'이라 답하면 될 것을, 무의식적으로 '까사'(스페인어로 '집'이라는 뜻, 쿠바에서는 '쿠바식 민박'을 의미)라고 답해버렸다. 심사관은 '응?'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쿠바에 친구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아니라고 했고 그때부터 대화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겨우 심사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도쿄에서 아바나 행 보딩패스를 받고 나서야 여행 실감이 났다.
쿠바에 입국할 때는 비자를 따로 구매해야 한다. 에어캐나다는 기내에서 무료로 나눠준다. 입국심사 시 반쪽을 찢어서 돌려주는데, 출국할 때 제출해야 하므로 잘 보관해야 한다.


국적이 '북한'으로 바뀐 사연


아바나 행 비행기는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쯤 늦게 출발했다. 한국 같았으면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이 쏟아질 텐데, 여기 사람들은 모두 느긋하다. 장시간 비행에 신경이 곤두서있던 나도 조금씩 느긋해지기 시작했다.


쿠바 입국심사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반드시 확인한다는 여행자보험 영문가입증명서와 출국비행티켓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혹은 중동에 다녀온 적 있냐는 질문에 'No'라고 대답하니 여권에 도장을 찍어줬다. 우선 환전소에 들러 한국에서 들고 간 890캐나다달러(CAD) 중 100CAD를 내고 73.90쿡(CUC)을 받았다. 환전이 잘 되었나 영수증을 살폈다. 응? 내 국적이 'Corea del Norte'(북한)으로 되어있다. 고쳐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귀찮고 피곤해서 그냥 나와버렸다. 그래,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는 그들에게는 남한보다 북한이 더 익숙하겠지.


저기요..! 제 국적은 Corea del Sur(남한)인데요?


여행지에는 왜 항상 사기꾼이 도사리고 있을까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서 아바나 시내로 가려면 택시를 타야 한다. 조금 걸어가면 시내버스를 탈 수도 있다는데, 그건 추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앞으로의 여행기에서 나온다.) 나는 밤 11시 넘어 공항에 도착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택시기사들이 들러붙었다. 2층 출국장으로 가면 택시비가 좀 더 싸다는데 역시나 피곤하고 귀찮았다. 한 택시기사에게 예약한 까사 주소를 보여주며 얼마냐고 물었다. 그는 30쿡을 불렀다. 쿠바의 1쿡은 미화 1달러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30쿡이면 한화로 4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금액. 비싸다고 말하고 공항 안쪽으로 향했다. 그가 내 앞을 가로막더니 27쿡을 부른다. 좋았어. 좀 더 깎아보자. 25쿡을 불렀다. 'No'라며 고개를 젓던 그는 내가 다시 돌아서자 알겠다며 내 캐리어를 잡아끌었다. 25쿡도 사실 싼 금액은 아니지만, 비교적 신형 택시를 타고 갈 수 있으니 감안하기로 했다. 택시 쉐어할 사람을 못 찾아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말이다. (원래 아바나 행 비행기 안에서 옆에 앉은 사람에게 쉐어 의사를 물으려 했건만, 야속하게도 그날 내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깜깜하고 조용한 밤길을 달렸다. 빛 공해와 소음 공해가 만연하던 곳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낯설어도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차분해졌다. 주소를 알려줬으니 기사는 숙소 바로 앞에 나를 데려다줄 터였다. 씻고 자는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다. 이런 내 생각과 달리, 기사는 큰 길가에 차를 세우더니 알아서 찾아가라고 했다. 아니, 뭐 이런 황당한 시츄에이션이?! 게다가 30쿡을 내자 잔돈이 없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바 현지인 화폐(모네다/MN)를 외국인이 쓰는 화폐(쿡)라며 사기까지 치려고 했다. 목구멍으로 '이 새끼가 어디서 사기를 쳐?'라는 말이 새어 나오려는 걸 겨우 막고, 그가 가진 잔돈을 탈탈 털었다. 1쿡과 60모네다가 나왔다. 1쿡이 24모네다니까 3.5쿡 정도를 돌려받는 셈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1.5쿡을 더 지출하고 말았지만, 얼른 이 망할 택시에서 내려야겠다는 생각에 차 문을 열었다.


쿠바의 외국인 전용화폐 쿡(CUC, 왼쪽)과 내국인 전용화폐 모네다(MN/CUP, 오른쪽). 쿡에는 동상 등의 조형물이, 모네다에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pixabay


여행 첫날이 항상 설레는 건 아니더라


길치인 데다가 밤눈까지 어두운 나는 숙소를 찾지 못하고 계속 헤맸다. 오프라인 지도 앱을 보며 발걸음을 옮겼지만 점점 목적지와 멀어질 뿐이었다. 동공지진으로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기 직전, 젊은 쿠바노가 다가왔다. 그는 까사를 찾냐며 도와주겠다고 했다. '쿠바에서는 호의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익히 들었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그에게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이밀었다. 그는 익숙한 길이라는 듯 나를 안내했지만, 지도 앱을 보니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허튼수작을 부리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이 방향이 아닌 것 같다는 내 말에 오던 쪽으로 방향을 틀고 연신 미안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숙소를 잘 찾아주기도 했고.


숙소 앞에서 까사 주인 아주머니의 아들을 만났다. 그는 내가 밤늦게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열쇠를 전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잠시, 숙소를 찾아준 남자가 표정을 싹 바꾸더니 내게 돈을 요구했다. 쿠바 여행기에서 익히 접했던 장면이었다. 호의가 호의가 아니었던 것. 고마운 마음은 이내 괘씸한 감정으로 바뀌었다. 돈이 없다고 버텼다. 다행히 주인 아주머니 아들도 나를 거들었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그는 내게 숙소 열쇠를 건네며 '호의를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많은 것을 의심부터 하는 내게 그리 충격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도착한 날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살짝 서글퍼졌다. 기대와 설렘으로 첫날을 보내고 싶었건만.


아바나에서 묵은 오달리스 까사. 이 정도 환경에 조식 포함 20쿡(한화 24,000원 정도)이면 훌륭하다. 지금도 운영되나 모르겠네.
매거진의 이전글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