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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Why not Cu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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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Jun 28. 2020

아직은 긴장을 풀 때가 아니었다

03. 폭풍전야

쿠바에도 불금이?!


듣던 대로 쿠바의 밤은 뜨겁고 강렬했다. 어디선가 강렬한 비트의 음악이 밤새 흘러나왔고, 종종 환호하는 소리도 들렸다. 꼬박 하루 걸려 도착한 지라 피곤했지만, 지구 반대편 섬나라의 불금 분위기와 시차 부적응으로 새벽 내내 잠을 설쳤다. 동이 틀 무렵, 한껏 취한 사람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한국인 관광객도 있었던 것 같다. 잔뜩 들떠있는 목소리에 여흥이 가득했다.


아침 8시쯤 씻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주방에서 식사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달리스 아주머니였다. 식탁 위를 보니 구아바 생과일주스, 빵, 계란프라이, 각종 열대과일, 커피 등이 있었다.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겨 있었다. 열대과일은 설탕을 뿌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달았다. 아, 수박은 제외!


소박하지만 맛있고 배불렀던 조식. 구아바주스가 정말 환상이었다. 한국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맛.


"쿠바인들은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들이야"


아바나대학 교수 출신이라는 그녀는 영어를 매우 잘했다. 어젯밤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내게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 일부는 어제 그녀의 아들이 했던 이야기와 같았다.


"쿠바인들은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들이야. 간혹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상처받지 말렴."

"길거리에서 '치나'(China, 스페인어로 중국 여자를 의미)라고 부르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조심해. 도와주겠다고 해도 거절해야 해. 보통 대가를 원하거든."


그녀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며 길을 나섰다. 오늘은 우선 숙소 근처인 아바나 비에하(Habana vieja, 아바나의 구시가지)를 둘러볼 예정이다. 그리고 비냘레스로 가는 방법도 알아봐야 했다. 오달리스 아주머니는 택시, 여행사 투어프로그램, 비아술(외국인 전용 시외버스) 등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택시를 구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이지만, 동행이 없는 나는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비아술 터미널은 숙소에서 멀기에 우선 근처 호텔 1층에 있는 여행사에 가보기로 했다.


까사 입구. 혹시 숙소를 못 찾을까 하는 노파심에 찍어두었다. 오른쪽 사진의 파란색 마크는 쿠바 정부에서 허가한 숙박 시설에만 붙여져 있다고 한다.


우선 오비스뽀(Obispo) 거리에 있는 환전소를 찾았다. 오전에는 붐빈다기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5분 만에 환전을 할 수 있었다. 오늘은 300CAD를 주고 222.90쿡을 받았다. 확실히 공항보다 환율을 잘 쳐준다. 참, 이때까지만 해도 어제의 여파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입은 애써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환전소 직원이 여권 사진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농담을 던졌다.


"이거 네 여권 맞는 거지? 사진이랑 다른 사람 같은데?"


피식. 웃음이 터졌다. 덕분에 눈에 가득 서려 있던 긴장이 슬쩍 떨어져 나갔다.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Sí, yo'(응, 나야)라고 말했다. 오달리스 아주머니의 말이 맞았다. 그래, 쿠바인들은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들이야. 환전 후, 중앙공원(Parque Central)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진으로만 보던 까삐똘리오(Capitolio)와 아바나 대극장, 그리고 형형색색의 올드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올드카를 타고 아바나 시내를 돌아보는 관광 프로그램도 있단다. 하지만 내게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비싸기도 하고 승차감이 좋지 않다는 후기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대신 투어버스를 타고 주요 관광지와 신시가지인 베다도를 둘러봤다.


올드카의 매연은 상상을 초월한다. 처음 마주하고 계속 기침을 했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아픈 느낌에 '폐암 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엔진 소리도 매우 크다.
쿠바의 옛 국회의사당인 까삐똘리오. 쿠바혁명이 있을 때까지 정부 소재지였다고 한다. 지금은 박물관 등으로 사용된다는데, 내가 갔을 땐 공사 중이었다.


투어버스 타고 아바나 한 바퀴


투어버스는 T1, T2, T3 세 가지가 있다. 각 노선의 티켓을 구매하면 동일 노선을 종일 이용할 수 있다. 원하는 관광지에서 내리고 타면 된다. 내가 탄 버스는 소지섭이 나온 광고의 배경으로 유명한 말레꼰(Malecón) 해변, 카리브해 해적과 적의 함대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모로성(모로 요새), 혁명광장 등을 들른다. 딱히 오래 보고 싶은 곳들은 아니어서 버스에서 내리지는 않았다. 다만, 쿠바 내무성 건물을 지날 때는 살짝 갈등했다. 벽면에 체 게바라의 조형물이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Hasta la Victoria Siempre'(영원한 승리의 그 날까지)라는 말에 괜히 마음이 동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또 다른 혁명을 위해 길을 떠나는 그의 마음속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버스는 출발지인 중앙공원으로 돌아왔다. 잠시 내려 비냘레스 투어프로그램을 알아보기 위해 호텔에 갈까 고민하다가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는 칵테일바 '엘 플로리디따'(El Floridita)로 향했다. 이때까지는 아직 두려웠던 것 같다. 영어나 스페인어 중 어느 하나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 의사를 어떻게 전달해야 하나' 고민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 같다.) 그래서 술기운 좀 빌려보기로 했다. 목이 많이 마르기도 했고.


더운 날씨였지만, 투어버스를 탄 많은 사람들이 2층에 자리를 잡았다. 나도 마찬가지.
태극기가.. 아니, 쿠바 국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체 게바라의 조형물 맞은편에는 역시 유명한 혁명가인 까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조형물이 있다. 이곳에는 'Vas bien Fidel'(잘하고 있어, 피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쿠바의 풍경.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찍었더니 구도가 다 엉망이네.


날은 덥고, 술기운은 올라오고


유명한 바 답게 내부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곳에서는, 헤밍웨이가 좋아한 두 가지 칵테일인 모히또(Mojito)와 다이끼리(Daiquirí) 중 다이끼리를 마실 수 있다. 그는 'Mi Daiquirí en El Floridita’(나의 다이끼리는  플로리디따에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 바를 사랑했다고. 바 곳곳에 남아있는 헤밍웨이의 흔적을 보며 딸기가 들어간 다이끼리를 시켰다. 6쿡. 한화로 7000원이 넘는 돈. 절대 싼 가격이 아니다. 괜히 심술이 나서 '술이 맛있어 봤자지' 하는 생각으로 한 모금 들이켰다. 어라?! 이게 무슨 맛이지? 신세계다. 너무 맛있어. 세상에나, 넘어가도 꿀떡꿀떡 너무  넘어갔다.


여러분, 스트로베리 다이끼리 꼭 드세요. 두 번, 아니 세 번 드세요!


한 잔 더 마시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호텔 1층에 있는 여행사로 향했다.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신 게 아닌데도 더운 날씨에 취기가 확 올라왔다. 평소에는 존재 여부조차 확인하기 힘든 '용기'라는 게 불쑥 튀어나왔다. 여행사 직원에게 손짓과 발짓을 동원하여 비냘레스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직원은 비아술 터미널에서 티켓을 사라며 친히 주소까지 적어줬다. 날은 덥고 술기운은 가실 줄 몰랐다. 택시를 탈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가격을 물어보고 이내 포기했다. 단순히 버스표를 사기 위해 왕복 만 원이 넘는 택시비를 지출하는 건 배낭여행자인 나에게 사치였다. 머리를 굴리다가 투어버스를 타고 비아술 터미널과 가장 가까운 관광지에 내려서 걸어가기로 했다. 덥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걷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기에.


이때만 해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 결정이 얼마나 큰 참사를 불러올지.

아직은 긴장을 풀 때가 아니었다.


아바나 비에하의 중심인 오비스뽀 거리. 식당, 카페, 환전소, 여행 안내소 등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혼자 다니는 동양인 여자는 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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