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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Jul 03. 2020

시작하기도 전에 꼬여버렸다

05. 울보의 탄생

멘탈이 와르르


, 당했다. 가방을 아무리 뒤져도 손전화가 보이지 않았다. 말 하나 통하지 않는 곳에서 '도둑이야!'라고 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당황해서 소리 지를 생각조차 못 한 것 같다. 소매치기범은 손전화에 꽂혀있던 보조배터리까지 훔쳐 갔다. 여권과 돈주머니가 들어 있는 포켓의 지퍼가 열려있는 걸 보니, 조금만 늦게 발견했으면   개도 영락없이 털렸겠구나 싶었다. 번잡한 버스 안에서 소매치기까지 당하고 나니 정신이 혼미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잘못했다가는 여권과 돈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가방을 단단히 챙겨 버스 뒤쪽으로 몸을 옮겼다.


심호흡을 크게 했다. 어찌 됐든 리브레 호텔에서 내려야 한다. 이것마저 실패하면 길까지 잃는다. 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마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아바나 리브레 오뗄?'이라고 물었다. 한 중년여성분이 그곳에 간다며 따라 내리라고 했다. 그녀 옆에 착 붙어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찔끔 새어 나왔다.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I lost my cell phone'이라고 말했지만 통할 리 만무했다. 공허한 외침이었을 뿐.


그냥 택시 탈 걸.


불행 중 다행으로 리브레 호텔에는 무사히 도착했다. 투어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가 유모차에 탄 아가를 데리고 여행 중인 동양인 부부와 마주쳤다.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한국어가 들리는데 또다시 울컥했다.


(다급하면서도 반가운 목소리로) "혹시 한국분이세요?"

(당황한 눈치) "네."

"제가 손전화를 잃어버려서 그런데, 몇 시인지 알 수 있을까요?"

"오후 3시가 조금 넘었네요."


그들도 나와 같은 투어버스에 탔다. 어쩌다 보니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남편분이 내게 물을 건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착잡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내가 안쓰러웠던 걸까. 한 모금 들이켜고 물병을 돌려주니 내 손에 있는 빈 물병을 가리키며 조금 덜어가란다. 내가 정말 불쌍해 보였나 보다.


숙소에 도착해 거실에 있는 전화로 오달리스 아주머니께 전화했다. 손전화를 잃어버렸다는 내 말에 아주머니는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셨다. 우선 분실신고부터 해야하니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했다. 호텔에 가면 된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숙소 근처의 잉글라떼라로 향했다. 로비 한 편에 인터넷존이 있었다. 프런트에 사용법을 물어보니 에떽사(ETECSA, 쿠바의 국영 통신사)에서 인터넷 카드를 사야 한다고 했다.


여행 첫날부터 종일 울다니


에떽사 앞에는 호객꾼들이 당시 정가 2쿡인 1시간짜리 인터넷 카드를 3쿡에 팔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그들의 카드를 샀다. 호텔 인터넷존으로 돌아와 인터넷 카드에 적힌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로그인이 안 된다. 혹시 몰라 들고 온 태블릿도 와이파이 신호를 잡지 못했다.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옆에서 다른 컴퓨터로 페이스북을 하고 있던 여자가 힐끔힐끔 나를 쳐다봤다.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내가 쓰고 있는 컴퓨터가 내국인용이라고 했다. 본인들이 쓰고 있는 게 외국인용이라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쿠바의 국영 통신사 에떽사. 항상 사람이 많다. 나는 이 지점이 아닌 잉글라떼라 호텔 옆에 있는 간이 지점 앞에서 호객꾼들에게 인터넷 카드를 샀다.
내가 산 인터넷 카드로는 1시간 이용이 가능했다. 첫 접속부터 30일간 유효하다. 물론 아무 장소에서나 접속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터넷 카드로는, 와이파이 신호가 잡히는 공원이나 호텔에서 모바일 기기로, 혹은 랜선이 연결된 컴퓨터로 접속이 가능하다.


기다리면서도 계속 눈물을 훔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금 뭣이 중헌디! 드디어 내 차례! 카카오톡 등의 메신저 접속이 불가능한 쿠바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건 페이스북뿐이었다. 한국 현지 시각을 계산해보니 새벽 6시 정도였다. 페이스북 메신저로 친구에게 말을 걸며 '제발 답해줘!'라고 주문을 걸었다. 띠링, 친구에게 답이 왔다. 분실신고를 부탁하고 대화를 나누는데 눈물이 계속 흘렀다. 아, 여행 첫날부터 종일 우는구나.


위약금이나 남은 할부금은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만 여행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꼬여버린 것 같아서 속상했다. 꿈에 그리던 쿠바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서러움을 가중했다. 돈 주고 여행자보험까지 가입했는데, 하도 심하게 당황한지라 경찰서에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불찰 덕에 뜨리니다드에서 아주 스펙터클한 경험을 했다.)


친구의 위로 메시지. 정말 나중엔 추억이 되었다. 비록 '기분 좋은'이라는 수식어는 붙일 수 없지만.


어리숙한 게 죄는 아니잖아!


호텔을 나와 오비스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시궁창에 떨어진 기분이었는데, 몸은 참 솔직하고 간사했다. 배가 고팠다. 오늘 하루 고생한 나에게 보상을 해주자는 생각에 랍스타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한편에 자리를 잡고 직원을 불렀다. 그런데 이 사람들, 아무도 내게 오지 않는다.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아도 '영어를 할 수 있는 직원을 불러주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내 뒤로 온 손님들의 주문은 잘도 받으면서, 나는 왜?


한참을 기다리다가 식당에서 나왔다. 직원들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캔 음료 두 개를 샀다. 칵테일인 줄 알았는데 쿠바산 탄산음료였다. 모두 시에고 몬떼로 라벨이 붙어있었다. 라임레몬맛은 시원하고 맛있었지만 오렌지맛은 너무 달았다. 노점에 들러 테이크아웃 피자도 샀다. 메뉴판에 숫자만 적혀 있어서 쿡인지 모네다인지 물으니 쿡이란다. 하나에 5쿡. 이 가격이면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식당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후회했다. 노점 주인이 5모네다를 5쿡이라고 사기 친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거든. 피자 맛도 너무 별로였고. 어리숙한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동시에 남들의 어리숙함을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이들에게도 진절머리가 났다.


밀가루 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문제의 피자.
시에고 몬떼로의 탄산음료. 사진 왼쪽이 오렌지맛, 오른쪽은 라임레몬맛.


숙소로 돌아오는 길. 쿠바노(Cubano, 쿠바 남자)들의 '치나'드립은 여전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나', '레이디', '린다'(linda, 예쁘다)라는 단어만 수십번 들은 것 같다. 부르기만 하는 건 참을 만했다. 하지만 휘파람을 불거나 윙크하면서 쪽쪽 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참기 힘들었다.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한국 가면 너희는 다 성희롱 범죄자야, 이 자식들아! 하지만 어쩌면, 수십 년 간 닫혀있던 나라에 살던 그들에게 외국인, 특히 동양인은 호기심과 반가움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화만 낼 것이 아니라 표현 방법이 잘못되었다고도 말해줄 걸 그랬다.


정말 긴 하루였다. 첫날부터 정말 버라이어티했다. 어쨌거나 목표했던 '비아술 터미널까지 교통비 들이지 않고 다녀오기'는 성공했다. 비록 손전화를 잃어버렸지만 말이다. 이제 나에게는 지도와 여행 정보가 없다.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한다. 이 상태로 쿠바에서 2주를 버텨야 한다니... 묘하게도 걱정과 동시에 기대감이 밀려왔다.

 

종일 샌들을 신고 걸었더니 물집이 생겼다. 급한 대로 휴족시간과 밴드로 응급처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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