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뜨리니다드 동네 산책
쿠바 날씨는 정말 덥다. 아열대성 기후라 스콜성 폭우도 자주 내린다. 내가 갔던 7월에는 특히 소나기가 잦았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고 밤늦게 돌아가던 다른 여행에서와 달리, 쿠바에서는 낮에도 수시로 숙소를 드나들었다. 더위와 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뜨리니다드에서 마지막 날도 마찬가지였다.
이날은 동네 산책을 해보기로 했다. 사부작사부작 골목골목을 걸었다.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가 슈퍼마켓에 들렀다.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물할 기념품을 샀다. 오늘은 꿀. 알고 보니 쿠바산 꿀은 유기농인 데다가 품질이 우수한 걸로 유명했다. 마침 까사 조식에 꿀도 포함돼 있어서 맛볼 기회가 있었다. 주로 빵에 발라먹었는데 과하게 달지 않고 맛있었다. 가격도 정말 저렴했다. 3천 원만 있으면 천연꿀 500g 1병을 살 수 있었다. 다만 용기가 유리인 게 아쉬웠다. 고민 끝에 딱 3병만 샀다. 이 3병도 캐리어 안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면서 깨지지 않을까 내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옷으로 몇 겹씩 칭칭 동여맨 덕분인지 다행히 하나도 파손되지 않았지만. 몇 병 더 사 올 걸 그랬다.
꿀을 산 이후에는 까사로 돌아와 잠시 더위를 식혔다. 다시 문을 나서면서 어디로 향할지 고민했다. 뜨리니다드 근처에도 예쁜 바다가 많다. 대표적인 곳이 앙꼰과 라 보까. 앙꼰은 사진으로 많이 접해서 라 보까 쪽으로 마음이 좀 더 기울었다. 거리는 대략 6km 정도.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는 거리였기에 ‘다녀올까?’ 잠시 생각했으나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더위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골목 골목을 누볐다. 그러다 동양인 무리와 마주쳤다. 쿠바에서 동양인을 본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들과 마주친다?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시선이 오가고 찰나의 탐색전이 이어졌다. 그들이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내 손에 들린 부채를 보고 한국인이라는 걸 확신했단다. 우와! 동양인, 아니 한국인이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에게 그간의 에피소드를 줄줄이 쏟아냈다. 그들은 손전화를 잃어버렸다는 내 말에 놀라더니, 일행 중 한 명을 가리키며 "얘는 남미에서 노트북과 여권을 털렸어요."라고 말했다. 듣던 대로 남미는 위험하구나. 발을 들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다짐이 무색하게도 3년 후 나는 페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짧은 만남을 마쳤다. 오랜만에 모국어 방언이 터져서 그런가 마음이 후련했다. 하지만 몸은 더운 날씨를 따라 계속 달아올랐다. ‘다시 까사로 가자!’ 부지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더워도 너무 더운 날씨.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아이스크림 가게가 눈에 들어왔고 내적 갈등이 시작됐다. ‘더우니까 사 먹자!’, ‘조금만 더 가면 까사야, 돈을 아끼자!’. 승부는 시시하게 끝났다. 어느새 나는 카운터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있었다.
오렌지맛 1스쿱과 딸기맛 1스쿱. 아이스크림은 시원하고 달았다. 다만 아쉽게도, 어느 여행기에서 본 것처럼 너무 빨리 녹았다. 그 여행기에서는 ‘쿠바의 아이스크림은 신기하게도 빨리 녹는다’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여행기에서는 조금 다르게 서술하려고 한다. ‘쿠바의 아이스크림은 당연하게도 빨리 녹는다’라고.
아이스크림도 나도 쿠바의 쨍한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버렸던 날. 그 숨 막혔던 더위가 이렇게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