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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Why not Cu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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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May 27. 2021

열차 운행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0. 증기기관차를 타고 잉헤니오스 농장으로

오늘은 열차를 타고 잉헤니오스 농장에 간다.


잉헤니오스 농장은 스페인이 쿠바를 점령했을 당시 사탕수수 재배를 했던 지역이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밀매하고 이주 시켜 노동력을 착취했는데, 농장주인 이즈나가는 노예 감시를 위해 45m의 7층짜리 감시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름하여 이즈나가탑. 쿠바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이 탑은 아이러니하게도 뜨리니다드 근교의 관광 명소다.


사탕수수 농장 가운데에 우뚝 솟아올랐던 탐욕의 이즈나가탑. 파놉티콘을 생각나게 한다.


길치에 방향치 콤보


잉헤니오스 농장에 가려면 하루 1회 운행하는 열차를 이용해야 한다. 어디선가 아침 9시경 열차가 출발한다는 이야기를 주워듣고서 조식을 먹자마자 까사를 나섰다. 하지만 방향 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는지라 갔던 길을 되돌아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길 반복했다. 역은 뜨리니다드 남부에 있는데 바보같이 북쪽에 있는 산티아나 광장까지 갔었더랬다. 모르면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기라도 해야 하는데, 동네 구경하며 놀멍쉬멍 걷다 보니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리저리 헤매다 역에 도착했을 때는 열차 출발 직전이었다. 허겁지겁 매표소에 들어가 티켓을 샀다. 열차는 경적을 내며 출발을 알리건만 직원은 느긋해도 너무 느긋했다. 나의 간절한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누며 아주 느릿한 손놀림으로 티켓을 건넸다. 신경질이 났지만 침착하기로 했다. 그래, 여기는 쿠바니까.


뜨리니다드 북쪽에 있는 산티아나 광장.
뒤늦게 역에 도착!
무사히 티켓을 끊고 드디어 열차 위로!


뒤늦게 탑승한지라 앉을 자리가 없었다. 서성이고 있으니 승무원이 앞쪽으로 오라며 손짓을 했다. 다행히 한 자리가 남아있었다. 열차의 매연을 정통으로 맞는 자리였지만 앞자리라 시야가 탁 트여서 감내하기로 했다.


시속 30~40km의 증기기관차를 타고 잉헤니오스 농장으로 가는 길. 왕복 6시간 정도 걸린다.
가는 길의 풍경은 산, 초원, 농장이 전부다. 온통 초록으로 물들어있다. 누군가는 재미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바라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날은 풍경이 보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이즈나가역에 도착했다. 탑에 이어 역에까지 이즈나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서 더 잊지 말아야 하는 이름. 탑은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들 올라가겠다고 줄을 섰지만 나는 일찌감치 뒤돌아섰다. 세련된 도시의 모습보다 자연 풍광에 더 열광하는 사람이 넓고 푸른 초원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어찌 포기했나 싶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탑 위에서 초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끌려와 지독한 감시에 쉴 틈 없이 착취당한 노예들의 모습이 상상될 것 같아서였다. 아름다운 것을 보며 마음이 아프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차분하게 마을을 둘러보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일찍 열차에 올라 바깥 구경을 하며 멍 때리는 시간을 가졌다.


이즈나가역.
신기하게도 역 한 편에 진료소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보건소 같은 곳일까?
이곳도 관광지라고, 탑 근처에 기념품 가게가 넘쳐났다.
정차한 열차에 올라 놀던 동네 꼬마들. 내가 'Hola'하며 말을 걸었지만 물끄러미 쳐다만 보더라.
쿠바. 삶. 사람들.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


뜨리니다드로 돌아오는 길. 한 승무원이 열차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더니 돌아오는 내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떤 지점에서는 주민들의 물건을 받아 올렸고 또 다른 어떤 지점에서는 반대로 주민들에게 물건을 내려주곤 했다. 교통이 열악한 도서 지역의 물품 운송에 기여하고 있는 듯했다. 문득 이 열차의 운행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잉헤니오스 농장을 찾는 관광객의 숫자가 0에 수렴하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말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역할과 가치는 충분하니까.


열차는 지역과 지역은 물론 주민과 주민도 연결하고 있었다.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밖으로 나와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던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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