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뜨리니다드 경찰서에서 생긴 일
이번 편은 조금 창피한 이야기다.
뜨리니다드 둘째 날.
아침 일찍 아바나로 가는 비아술을 예약하고 까리히요 광장으로 갔다. 에떽사에서 와이파이 카드를 사서 태블릿으로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손전화를 잃어버렸다는 지난 포스팅에 사촌언니가 단 댓글이 보였다. "경찰서에 가서 도난확인서를 받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니 나에게는 여행자보험이 있었다. 이런 일이 처음인 데다가 당황한 나머지 도난확인서는 생각조차 못 했더랬다. 여행자보험을 쓸 일이 발생하지 않길 바랐건만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네. 그래도 '기기의 남은 할부 값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기대가 생겼다.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경찰서를 가야겠다고 했더니 알베르띠꼬 아저씨가 비씨택시(bici taxi, 자전거를 개조하여 만든 택시)를 잡아주셨다. '굳이 비씨택시까지'라고 생각했지만, 기사님은 나를 싣고 페달을 꽤 오래 밟으셨다. 경찰서 입구로 들어가 상황을 설명하니 조금 기다리란다. 10분, 20분, 30분.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쿠바에서는 모든 게 느긋하니까. 하지만 2시간이 다 되도록 기다리게 하는 건 너무 하지 않나. 언제 내 이름을 부르냐고 여러 차례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것.
그렇게 2시간 넘게 기다려 면담을 시작했다. 일관성이 중요할 테니 절대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차분하게 말하자고 다짐했다. 내 다짐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상황은 점점 꼬여갔다. 어디서 잃어버렸냐는 질문에 '아바나의 시내버스'가 아니라 '뜨리니다드 에떽사 앞'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이 대답도, 당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바나에서 잃어버린 손전화를 왜 뜨리니다드에서 찾느냐'라는 반응이 돌아올 것 같아서였다. 도난확인서를 빨리 손에 넣고 싶기도 했다. 내 답을 들은 경찰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쿠바에서 도난, 특히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도난은 굉장히 심각한 사안이에요.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출국 금지 명령이 떨어질 수도 있어요."
뭐지. 겁을 주려는 건가. 당황스러웠다. 다시 한번 '차분'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계속 좋지 않게 흘러갔다. 모국어로 거짓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외국어로 거짓말을 하려니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는 옆에 있던 다른 경찰에게 에떽사 앞 CCTV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나에게 "당신의 말이 사실이 아니면, 확인서를 발급해줄 수 없어요. 요즘 보험금 때문에 거짓말하며 사기 치려는 사람들이 많던데, 제 눈에는 당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아,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 도난당해서 억울한 사람은 난데, 오히려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잖아.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사실 이 눈물에는 거짓말에 대한 부끄러움과 발각에 대한 두려움도 녹아있었다. 경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더 환장하게 했다. "왜요? 들켜서 겁나나요?" 정말 눈치백단이다. 아니면 내가 바보 같거나.
멍청이. 며칠만 더 참고 아바나에 가서 신고하지.
CCTV를 확인하러 갔던 경찰이 돌아왔다. 결국 나는 빈 손으로 경찰서를 나와야 했다. 거짓말이 부른 화였다. 이 느긋한 곳에서 나는 뭐가 그리 급했을까. 한국에서도 안 가본 경찰서를 쿠바에서 가서 괜히 생고생만 했구나.
경찰은 마지막으로 "손전화가 숙소에 있을 수도 있으니 잘 찾아보라"라고 했다. "남은 여행에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길 바란다"라고도 했다. 분명 좋은 말인데 이상하게 찜찜했다. 그 사람들, 내 여권 복사해갔는데 말이야. 혹시 나 출국 금지 당하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