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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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지는 하나였다. 너무 아팠고 힘들었고 지쳤다. 난생처음 하혈이란 걸 했고, 빈혈이 심해져 헤모글로빈 수치가 정상의 반토막이 났다. 평지를 걷는데 몸이 휘청이고 호흡이 가빠졌다. 불면증은 기본, 수시로 찾아오는 부정맥과 난독증은 사람을 환장하게 했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무조건 누웠다. 눈을 감으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참아보려고 해도 몸과 마음이 무너지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퇴사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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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을 쉬지 않고 일했다. 항상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돌이켜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럽거나 자책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매 순간 최고는 아니었을지언정 최선이 아니었던 적은 없다(이건 일 외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게다가 과거의 나는 지금보다 어렸고 미숙했고 부족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거나 더 괜찮은 선택을 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아쉬운 지점을 발견했다는 건, 내가 그만큼 자랐다는 방증이 아닐까. (자기 합리화의 끝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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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어떤 망설임도 없이 항상 '그냥 쉬겠다'고 답했다. 쉬어야만 했다. 바닥을 치다 못해 땅을 파고 들어간 몸과 마음을 정상으로 끌어올려야 했으니까. 잘 자고 잘 먹고 진료도 부지런하게 받았다.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꽤 이른 시간 내에 건강이 호전됐다. 혈색소 수치가 여전히 정상 밑을 맴도는데, 빈혈이야 어렸을 때부터 계속 달고 다녔던 거라 그러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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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8개월째. '건강 회복' 말고는 별다른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운이 좋게도 평소에 이루고 싶었거나 해결하고 싶었던 것을 도장 깨듯이 해냈다. 반토막 난 가계소득 덕분(?)에 주택담보대출을 정부 상품으로 갈아타게 되면서 이율을 무려 2%나 낮출 수 있었다. 시간 활용이 자유로워진 덕에 좋아하는 아이돌의 음악방송 무대도 여러 차례 보고 왔다. 정해지고 짜인 시간 내에서 무언가 해내기 위해 급급하던 14년의 날들과 달리, 그날그날 그리고 순간순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신을 잘 살필 수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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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다. 로또가 당첨되지 않는 이상, 살고 있는 아파트 매매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지 않는 이상, 하늘에서 갑자기 돈 뭉텅이가 떨어지지 않는 이상, 나는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 이런 부담감(?) 때문인지, 마음속에서는 이력서를 백 번 넘게 쓴 것 같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게 문제일 뿐. 최근에는, 한없이 바쁜 마음과 세상 게으른 몸의 줄다리기에 지쳐 '오늘도 이렇게 허무하게 하루를 보냈구나'하고 자책하는 날이 늘어났다. 그러다가 '기록'이라는 걸 떠올렸다. 내 몸과 마음이 유일하게 타협이 가능한 평화의 지대.
그러니까 정리를 해보면,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자극하기 위해 뭐라도 써보겠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