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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Jul 06. 2024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기

02.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랑이 찾아왔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새 오빠가 생겼다. 아니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적으니까 아들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조카? 모르겠다. 호칭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자. 이야기의 핵심은, 아주 오랜만에 대가 없는 애정을 쏟고 싶은 상대가 생겼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고나 할까. 놀랍게도 이 존재는, 2023년 초부터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이 처음은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다'던 god가 있었다. '하루만 네 방의 침대가 되고 싶다'던 동방신기가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는 '네가 하면 다 맞는 말이 된다'던 갓세븐이 있었다. 그래, 그들도 내 마음을 설레게 했지. 하지만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그들을 사랑하던 당시의 나에게는 '여유'와 '기회'가 없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20여 가구만 살던 작은 마을을 떠나본 적 없는 내가, 영화관과 패밀리레스토랑을 스무 살 넘어 처음 가 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할 줄 알았겠나).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의 나는 '더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영원히 '간잽'(연예인을 가볍게 좋아하거나, 간만 보는 사람들의 행위를 일컫는 신조어. 심취하기 전의 단계를 의미)만 할 것 같았던 내가, 느지막이 누군가의 골수팬이 되어버렸다. 팬클럽 가입은 기본. 최애의 스케줄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방송 출연분을 샅샅이 분석한다. 최애가 모델인 제품을 사고 포토카드를 모은다. 음원 성적을 올리기 위해 24시간 노트북을 켜놓고 스밍(응원하는 가수의 곡을 플레이리스트로 만들어 반복 재생하는 것)이라는 것을 한다. 덕메(덕질메이트)와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최애 이야기를 나눈다. 최애 얼굴 한 번 보겠다며 음악방송 사전녹화 신청 대열에도 합류한다(선착순 신청인데, 떨어지면 종일 우울하다). 최애에게 부조리한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크게 목소리를 낸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이렇게 무섭다.


사전녹화의 흔적. 팔찌와 응원법이 적혀있는 슬로건. 새벽 녹화에 당첨되는 날에는 종일 퀭한 눈으로 좀비처럼 지내게 된다. 하지만 최애를 볼 수만 있다면 그깟 새벽이 대수겠냐.


적어두고 보니, 누군가는 나를 '한심하다'고 여길 것도 같다. '나이 먹고 뭐 하는 거냐'고 혀를 끌끌 찰 것도 같다. 그들에게 외치고 싶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웃음) 진지하게 말하는데, 최애를 바라보거나 생각하면 기분이 묘하다. 무대에서 몸이 부서지도록 춤을 추고, 목 핏대를 세워가며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 괜스레 울컥하기도 한다. 열심히 하는(사는) 모습이 예쁘고 고와서 온 마음 다해 응원해 주고 싶다. 동시에 나 역시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삶의 원동력이 된달까. 그래서 그런지 최애를 좋아하고 아끼며 설레는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다. 이게 사랑 아니면 뭔데! 하지만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는 모르겠다. 가족을 향한 사랑도 아니고, 연애의 감정도 아니다. 뭐라 설명할 수가 없다. 사랑이라는 것만 확실할 뿐.


내 최애. 제로베이스원(ZEROBASEONE, ZB1) 메인보컬 김태래.


덕질을 하다 보면 종종 우리네 삶의 단면을 발견하곤 한다. '사회의 축소판'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같은 그룹이어도 '인기도'에 따라 멤버별로 차등이 생기는 포토카드 시세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랜덤 굿즈의 홍수 속에서 자본주의를 본다. "내 애(최애)가 최고"라면서 분쟁을 일으키는 이들의 모습에서 삐뚤어진 부모의 삐뚤어진 사랑을 본다. 종종 눈살이 찌푸려지고 화가 나는 날도 생긴다. 덕질을 그만두면 굳이 받지 않아도 되는 스트레스인데, 사서 고생하는 꼴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좋아하고 아끼는 내 모습이 참으로 신기해서, 그 경험이 더없이 소중해서 이 사랑을 멈출 수가 없다.


감정이 영원할 리 없다. 지금의 내 마음도 언젠가 사라질 수 있겠지. 하지만 '사랑했던 경험과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기억은 잊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스며드는 것'이니까. 설렜던 기억과 소중히 여겼던 경험 역시 내 영혼에 깊이 파고들 것이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앞으로의 내 삶을 더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무언가에 열정을 쏟아붓고 애써서 좋아했던 경험이 주는 힘을 믿는다.


그래서 마음껏 좋아하기로 했다. 분노, 혐오, 갈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찾아온 건 감사하고 기적 같은 일이니까. 언제 또 이런 귀한 손님이 찾아오겠어. 뭐든 있을 때 잘하고 최선을 다해야지. 안 그래?


게다가 내가 언제 또 아이돌 콘서트에 가보고 싶겠어. 기력 있을 때 가야 해. 나이 더 먹으면 스탠딩 콘서트 못 가. (웃음)


최애를 동물화한 인형과 포토카드. 굿즈가 계속 쏟아진다. 많아도 너무 많아서 늘 적당히 사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소용없더라. 최애 앞에선 늘 속절없이 무너져 결국 지갑을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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