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덕질을 하고 있는 프로가 있다. 바로 드라마 '정년이'다. 최종 리허설 편부터 최근 방영된 10화까지 모두 챙겨보고, 재방송, 유튜브 클립, 인스타그램 검색창에 뜨는 짧은 숏폼 영상, 배우들의 인터뷰까지. 모두 하나하나 챙겨보며 극의 내용과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을 따라가고 있다.
드라마가 끝난 뒤 여운 때문에 한 장면을 100번 넘게 돌려본 적은 없었다. 그만큼 정년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특히 최근 방영된 8화에서 정년이가 떡목이 된 채로 바보와 공주 오디션 곡을 부르는 장면은 온몸에 전율이 일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내 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2024년도에 정년이의 8화의 엔딩을 넘어서는 작품이 적어도 나에겐 없을 것 같다. 이 장면에서 여럿 울었지 않았을까. 자기도 모르게.
https://youtu.be/X4-QH-MYM-g?si=NMOBHRWfGzuvAxlZ
정년이가 왜 이토록 나에게 와닿는 것일까 생각해 봤다. 어떤 드라마의 소재와 캐릭터, 그리고 배우와 연기에 대해서 이토록 궁금해졌던 적이 처음이고, 이런 내 반응이 너무 신선해서 해서 결말이 어떻든 상관없이 정리를 해두고 싶었다. 무엇이 이토록 내 마음을 움직이고 자극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1) 국극이라는 신선한 소재
1950년대에 인기 있었던 '여성국극'이라는 것을 드라마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남역과 여역까지 모두 여성들이 맡아 연기했던 시절, 지금 아이돌의 팬덤 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드라마 속에서 ‘자명고', '바보와 공주'와 같은 국극 무대를 보면서 극속의 인물을 또 완벽히 연기해내는 배우들에 대한 경이로움과 동시에, 이번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장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 자체로 마음이 두근거렸다. 한 번도 다뤄진 적 없는 '국극'이라는 소재로 이토록 아름다운 연기와 무대를 보여주는 드라마 '정년이' 덕분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판소리'라는 장르와, '우리의 것'이 품은 예술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 나에겐 큰 기쁨이자 즐거움이다.
2) 배우들의 피땀눈물이 담긴 혼신의 연기
정년이를 보면 주조연이 따로 있나 싶다. 모든 배우가 마치 목포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매란국극단'의 단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김태리 배우의 '정년이'캐릭터는 너무나 실제 같아서 ’스물다섯스물하나,‘’악귀‘, ’미스터 선샤인‘, ’아가씨‘ 등 기존의 작품의 캐릭터가 떠오르지 않았다. 김태리 한 사람이 연기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 자연스러운 사투리와, 3년 가까이 연습한 '자기 목소리'가 담긴 ‘소리’ 덕분에 시대극에 대한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정년이를 둘러싼 인물들도 캐릭터를 자신의 완벽히 소화해내서 국극 무대든 드라마든 깊은 몰입이 가능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정은채'배우의 문옥경 캐릭터인데, 아마 이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느꼈을 것 같다. 안나의 현주와, 파친코의 경희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걸음걸이와, 서고 앉은 자세, 눈빛과 목소리 톤까지.남역'을 맡고 있는 문옥경을 연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배우들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정년이를 준비하며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는지 깊이 알 수 있었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매회차 감동하며 보게 된다. 겨우 12화라니 너무 아쉽다.
3) 관계성
이 드라마에는 모녀관계, 자매 관계, 친구 관계, 사제 관계, 동료 관계 등 각각 인물들의 관계가 얽히고설켜 서사가 만들어진다. 흙감자 정년이가 사람이 되어가는 성장기를 다루면서 그 주변의 각각의 인물이 가진 서사를 하나하나 조명해내가는 연출이 너무나도 인상 깊었다.
- 타고난 재능을 가진 천재. 밝고 당당하나,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엄마의 그늘에 가려질까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세우는 정년이와 기본부터 탄탄히 밟아온노력형 천재. 겉으로는 차갑고 속은 따뜻하지만, 최고가 되어야 자기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늘 스스로 채찍질하며 완벽을 추구하는 영서
- 자신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까 하는 걱정이 앞서 자식의 꿈길을 막아서는 채공선과 딸을 자기 증명의 수단으로 삼는 한기주
- 후배의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주는 옥경과 후배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까 두려워 앞길을 막아서는 혜랑
- 정년이와 허영서 모두가 기댈 만큼 따스운 심성을 가진 주란. 아픈 언니를 대신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국극단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인물.
- 예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진 참 리더, 강소복 단장.
여러 캐릭터가 모여 매 회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통해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물론 이건 지극히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단편적인 인물 설명이고, 회차를 거듭하며 조금씩 변화해가고 있다.) 영서를 보며 끝없이 자신을 증명해야만 하는 삶에 대한 부침에 공감하기도, 정년이의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을 닮고 싶다가도, 자신을 향한 스스로의 기대와 부모의 그늘에 가려지지 않으려 끝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며 공감하기도 하면서.
배우들이 본업을 잘하면 생기는 일이 이런 걸까 싶었다. 실존 인물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 배우들의 일이라지만 소리와 춤, 노래와 연기까지 모두 완벽히 해내는 배우들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이 너무 인상 깊다. 하나의 캐릭터를 완성하기 위해, 단 한 줄의 '지문'을 완벽하게 완성해 내기 위해 길게는 3년 짧게는 1년이라는 시간을쏟아붓은 배우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배우'와 '연기'라는 것 자체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정도니까. 얼마나 이 배우들이 헌신과 열정을 다했는지 '날'보며 깨닫는다.
요즘 내 삶의 즐거움이자 낙이다. 정년이 영상 클립에 달린 댓글을 보며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건 아니구나' 싶고 같은 장면을 봐도 '이렇게 느낄 수 있구나'하면서. 이하나의 드라마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고 한탄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참 재밌다.
이 드라마의 끝이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 정년이와 영서가 매란국극단의 주역이 되어 공연을 올리는 것으로 막을 올릴 것 같고, 남은 2회 차는 조금 희망적이고 밝은 분위기가 이어질 것이라 예상된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6주간 느꼈던 희로애락은 이 드라마가 남긴 여운은 올해가 가기까지 이어질 것 같다. 드라마가 끝나고 정년이 대본집을 읽어 볼 참이니까.
오랜만에 이토록 행복한 덕질을 한다. 무용한 것에 시간을 쓰며 또 다른 행복을 채운다. 이럴 때 보면 어떨 땐무용한 것이 가장 유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