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드 다이아몬드 박사의 책을 읽고
인류의 발전은 어째서 각 대륙에서 다른 속도로 진행되었을까?
이 질문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유럽과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사람들이 현대 세계의 부와 힘을 독점하고 있다. 오세아니아, 남북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원주민들은 땅을 모두 빼앗기고 몰살당하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저자의 결론은 하나다. “결국 지역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최초로 식량 생산을 시작한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농경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농경을 본 적이 없었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식량 생산은 결과를 짐작하지 못하고 내린 여러 결론들의 한 부산물로서 ‘진화’되었던 것이다”
수렵채집인들이 처음으로 농작물을 키우고 동물을 가축화해나간 과정은 본능적인 선택에 가까웠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먹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노력을 어떻게 할당할 것인지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우선순위를 매겨보고 선택을 한다. 먹을거리를 찾을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적은 시간에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맛있고 필요한 영양분을 얻을 수 있는 먹거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동시에 끼니를 거르게 될 위험을 최소화하려 한다.
수렵 채집에서 농경 생활로의 전환은 먹거리를 찾는 방식을 보완한 것이다. 최초의 채소밭은 야생 먹거리를 구할 수 없을 경우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과 같은 기능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이유로든 식량 생산이 수렵 채집보다 경쟁력이 커졌음이 분명하다. 야생 먹거리가 감소했을 가능성이 크다. 야생 먹거리 감소는 기후 변화 때문일 수도 있고 지역적 특성일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식물의 작물화에 따른 보상이 커지기 시작했다. 땅이 비옥한 지역에서 기후 변화로 야생 곡류가 자라는 곳이 많아졌고 이것을 수확하는 것이 곡류를 작물화 전 단계에 해당한다. 이후 야생 곡물을 수확하고 껍질을 벗기고 또 저장하는 기술이 향상되면서 곡류를 직접 재배하게 된다.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되면서 인구가 증가한다. 인구 증가는 식량 생산에도 유리하다. 하지만, 인구 증가가 먼저인지 식량 생산이 먼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인구 밀도가 증가하면서 더 많은 먹거리를 구해야 했고 한 곳에 정착하면서 식량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더 유리해지면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더 증가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사피엔스>에서의 설명처럼 수렵채집인보다 농경 생활을 한 사람들이 더 많은 시간을 일하면서도 오히려 영양 상태는 더 나빠졌는데, 이러한 모순은 인구 밀도 증가가 먹거리 증가에 비해 좀 더 빨랐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경작에 유리한 작물을 선택하였고 자연선택의 방향을 180도 바꿔놓았다. 종전에는 성공적이었던 유전자가 갑자기 치명적이 되고 반대로 치명적이었던 돌연변이가 성공적으로 바뀌었다.”
농부들은 채집하는 것보다 직접 키우는 데 유리한 작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열매의 맛이 좋고 크기가 커야 하고, 쉽게 종자를 퍼뜨려 자주 수확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기름과 섬유 같은 부산물을 얻을 수 있으면 더 좋다. 예를 들어, 완두콩은 그 씨앗이 꼬투리 속에서 자란다. 야생 완두콩이 더 퍼지려면 그 꼬투리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완두콩은 열매가 익는 시점에 콩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유전자를 진화시켰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꼬투리가 터지지 않고 그대로 달려 있어야 수확하기가 쉽다. 야생 밀도 비슷하다. 줄기 끝에서 자라는 열매가 줄기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아야 편하게 수확해서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선택이 콩과 밀을 의도하지 않게 개량한 것이다.
오늘날 인간이 생산하는 주요 농작물 12종 중 5종이 곡류(밀, 옥수수, 쌀, 보리, 수수)이며, 곡류에는 부족한 영양분인 단백질을 보완하는 작물이 콩류다. 그리하여 곡류와 콩류가 균형식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다음으로 인간이 선택한 작물이 과실수와 견과류다. 이 식물들은 심은 후 3년이 지나야 열매를 거둘 수 있지만 사과, 배 같은 과실수와 달리 씨앗을 심거나 나뭇가지를 꺾꽂이하여 쉽게 키울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농경 활동의 시작 시점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서남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고 남북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가 가장 늦다. 왜 그럴까? 초승달 지대는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나 다양한 작물이 자랄 수 있어 농경민들의 선택의 폭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넓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지중해성 기후대이고 계절별, 연도별 기후 변화가 커 종의 다양성과 한해살이 식물이 많았다. 또한, 짧은 거리 안에 고도와 지형 변화가 심해서 같은 식물이더라도 수확기가 달랐고 그로 인해 산비탈을 올라가면서 장기간 수확이 가능했다. 그러다가 불규칙한 강수량으로 수확량이 달라지는 작물을 물이 풍부한 하천 유역에 심어 직접 재배하게 된다.
미국 동부지역에서는 서남아시아 초승달 지역보다 6천 년이 늦은 기원전 2천 년 경에 작물화가 시작된다. 작물화된 식물은 호박, 해바라기 같은 것으로 농경으로 완전히 전환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원주민들은 수렵채집인으로 살면서 포유류와 물새류, 어패류, 견과류 등에 주로 의존하여 살았다. 이후 여러 작물들을 키우기는 했지만, 기원후 200년에 옥수수가 들어오고 1,100년경 누에 콩이 들어오면서 기존의 호박과 함께 3대 작물이 재배되면서 농경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이로 인해 유라시아 대륙에 비하면 너무 늦게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의 식민지화라는 재앙에 대비할 겨를이 없었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처럼,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 수 없는 동물은 그 이유가 제각기 달랐다.”
농경으로 정착 생활을 하면서 야생 동물에 대한 가축화도 진행되었다. 가축화된 대형 포유류는 인간 사회에서 고기, 유제품과 같은 식량이 될 뿐 아니라 가죽과 털, 비료 같은 부산물을 제공했고, 경작, 수송 등에 필요한 근력도 제공했다. 가축의 분뇨는 작물의 거름이 되어 생산량을 확대하였고, 소가 끄는 쟁기가 사용되면서 흙이 단단한 지역도 경작하여 더 넓은 곳에서 농경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야생 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상대적으로 적게 먹고 빨리 자라야 하며 우리 안에서 번식을 시킬 수 있어야 했다. 기질적인 면에서는 거칠지 않고 겁을 먹어도 도망치지 않으며 무리 내에 사회적 위계구조가 있을수록 다루기가 편했다.
모든 대형 야생 동물이 한 번쯤 가축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1만 년 전 양으로 시작해 염소, 돼지, 소, 말의 순서로 가축화가 진행되었고 기원전 2,500년경 낙타류가 마지막이었다. 종으로는 모두 14종에 불과하며 13종이 유라시아에서 발생했고 단 1종(라마)만이 남아메리카에서 이루어졌다. 북아메리카, 호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는 단 1종도 없었다. 야생 포유류가 풍부하고 다양한 남아프리카에 가축화된 포유류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야생 동물의 가축화는 농경 생활을 촉진시켰지만, 세균이라는 치명적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세균도 기본적으로는 다른 생명체와 똑같이 진화한다. 다만 생존과 번식에 있어 동물이나 인간이라는 피해자를 이용하여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모기나 벼룩을 이용하기도 하고 신체 접촉이나 기침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구가 충분히 많고 밀집되어 있어야 인플루엔자, 천연두 같은 전염병이 지속될 수 있다. 누군가 처음으로 감염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퍼지고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인간이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동안은 이러한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소나 돼지 같은 사회적 동물을 가축화시켰을 때 이미 이 동물들은 유행병의 세균을 갖고 있었고 그 세균이 인간에게 옮겨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다만,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면역이 생겨 오랫동안 재발하지 않았다.
먼저 농경 생활을 시작한 곳에서 전염병을 피할 수 없었지만 동시에 전염병에 대한 면역도 생겼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진출했을 때 총칼에 죽은 원주민보다 병원균에 의해 목숨을 잃은 원주민 수가 더 많았다. 스페인이 멕시코 지역 아즈텍 제국과 싸울 때 천연두가 아즈텍족의 거의 절반을 몰살시켰고, 페루 지역 잉카 제국을 정복할 때도 천연두가 원주민 대부분을 몰살시켰다. 남북 아메리카의 유행병이 유럽인을 해치지는 못했다. 가축화된 동물이 거의 없었고 가축화된 라마는 무리가 크지 않고 젖을 먹지도 않으며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지도 않아 인간 병원체의 공급원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술이란 어느 영웅의 개별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누적된 행동을 통해 발전하며, 어떤 필요를 생각하여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 이후에 그 용도가 새로 발견된다.”
인류의 기술은 250만 년 전 최초의 석기에서 시작하여 오늘날의 스마트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두 차례의 중요한 기술 도약이 있었다. 첫째는 진화 과정의 유전적인 변화로 인지 능력이 크게 향상된 것이고, 둘째는 농경 및 정착 생활을 하면서 일어났다. 특히, 정착 생활은 수렵채집 생활과 달리 ‘들고 다닐 수 없는 소유물’을 보유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했다. 생산량이 늘고 인구 밀도가 증가하면서 식량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전문가들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다. 전문가들 중에는 정치적 지배계층도 있지만 다양한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기술 발전은 한순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간단한 문제부터 차근차근 해결하면서 노하우가 축적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석기시대 농경민이 갑자기 철을 추출하거나 가공할 수는 없다. 철보다 가공하기 쉬운 구리와 금으로 수천 년의 경험을 먼저 쌓고, 이후 점점 높은 온도에 녹는 금속을 다루면서 불과 열을 다루는 기술을 익혀야 했다. 고온의 용광로가 필요한 철광석 야금술은 한참 더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얻을 수 있었다.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는 한 사회 내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을 발명한 사회에서 전파되는 경우가 더 많다. 운반에 유용한 바퀴는 기원전 3,400년경 흑해 부근에 처음 나타나서 몇 세기 이내에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 퍼진다. 유라시아에서 바퀴의 모습은 널빤지 석 장을 짜 맞추어 둥글게 깎은 원판 모양이었는데, 나중에 발명된 아메리카 원주민의 바퀴는 한 덩어리로 만들어졌다. 유라시아에서는 새로운 발명품의 효과가 인정되면 쉽게 여러 지역으로 퍼졌지만, 그것이 신대륙까지 퍼지지는 못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유라시아 대륙은 신대륙과 비교할 때 농경 생활에서 앞섰을 뿐 아니라 기술의 전파도 유리했다. 유라시아는 대륙의 주요 축이 동서 방향이어서 한 지역의 발명품이 비슷한 위도와 기후를 지닌 다른 지역으로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남북 아메리카의 주요 축은 남북 방향이어서 무엇이든 확산되기 위해서는 동일한 위도상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위도와 기후의 변화를 극복하고 이동해야 했다. 예를 들어 바퀴는 중앙아메리카에서 발명되었고 라마는 기원전 3,000년경 안데스 중부에서 가축화되었다. 하지만, 이후 5,000년이 지나도록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짐을 나르는 가축인 라마와 새로운 발명품인 바퀴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 마야와 잉카 제국 사이의 약 1,900Km의 거리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결국 유라시아 대륙이 아메리카 대륙에 비해 농경과 기술 전파에 유리했다는 것이다. 특정 인종이나 문명의 역량이나 수준 차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인종적 차별주의를 막는 논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 환경이 자신의 노력보다 더 중요하게 인식되게 만드는 논리로 쓰일 수도 있다. 오늘날 빈부의 격차가 결국 타고난 부의 크기에 따라 거의 결정되는 것처럼 환경이 더 중요하다면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신대륙의 잉카 문명과 아즈카 문명이 분명 꽤 높은 수준까지 이르렀지만 서유럽 국가들에 의해 쉽게 정복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