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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수 Aug 14. 2019

조지 오웰의 <1984>


<1984>년에서 사람들은 엄격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살아간다. 20세기 초 이미 인간은 전체주의를 경험했다. 하지만 1984년의 무서움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통제한다는 거다. 통제는 언어의 단순화와 이중적 사고로 구체화되고 심화된다. 


우리의 생각은 언어로 표현되기에 언어를 단순화하면 생각도 좁아진다. 주어진 단어 안에서만 표현이 가능하다. 과거의 모든 기록과 문학 작품들도 단순화된다. 다양하고 풍요롭던 인간의 과거 지혜가 모두 사라지는 거다. 이중적 사고는 더 과감한 통제 방법이다. 모든 사실은 쉽게 왜곡된다. 지배 계급의 사상과 논리에 맞게 과거와 현재의 모든 기록이 매 순간 바뀐다. 하지만 그것을 수정하는 사람들조차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훈련된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듯 진실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도록 스스로를 기만한다. 그들의 삶은 권력의 도구일 뿐이다.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행한다. 이 기계는 윈스턴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한다. 더욱이 그가 이 금속판의 시계(視界) 안에 들어 있는 한, 그의 일거일동은 다 보이고 들린다.”


윈스턴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국가를 지배하는 당과 우두머리인 ‘빅 브라더’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건물 밖에는 사상경찰과 순찰기가 주시하고, 건물 안에는 ‘텔레스크린’이 어디에나 있어 그것을 피하긴 어렵다. 그것은 당이 사람들에게 전파하고자 하는 거짓된 진실을 보여주고, 동시에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지 기록하는 기계다. 사람들은 언제나 텔레스크린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윈스턴은 보도, 연예, 교육 및 예술을 관장하는 ‘진리부’에서 일한다. 그는 ‘기록국’ 소속이며 잘못된 과거를 수정하는 작업을 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다시 고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1984>가 의미하는 과거는 전혀 그렇지 않다. 현재 당이 알리고 싶은 사실에 어긋나는 과거라면 언제든지 그 내용을 고친다. 예를 들어, 어떤 상품에 대한 최근 생산량이 과거에 발표한 기록과 비교할 때 줄어들었다면 과거 기록에 있는 생산량 숫자를 줄임으로써 최근의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고 발표하는 식이다. 


윈스턴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 일이 과거의 기록을 왜곡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챈 후로 충성심이 깨어진다. 단순히 의심을 품는 것을 넘어 당에 대한 반역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당의 감시가 삼엄한 상황에서 적극적인 반역을 꿈꾸는 건 불가능하다. 


그가 하는 것이라곤 한 고물상의 진열장에서 몇십 년 전에 만들어진 크림색 종이의 노트를 구입하여 일기를 쓰는 것 정도이다. 그게 불법은 아니지만 발각되면 사형이나 적어도 강제노동 25년 형의 선고를 받을 게 틀림없다. 영화관에서 본 전쟁영화에 대한 내용을 적어 내려가면서도 도대체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 ‘빅 브라더를 타도하라’는 문장을 반복해서 써내려 갔지만 그마저도 큰 의미가 없다. 그는 이미 생각만으로 ‘사상죄’를 저질렀고 언젠가 다른 사상범들과 마찬가지로 체포되어 그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남지 않고 사라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이중사고’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 진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꾸민 거짓말을 하는 것, 철회된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


과거는 본질적으로 변경될 수 없다. 하지만 당은 현재를 지배하고 있기에 과거도 지배하고자 하며, 이것을 통해 미래를 지배하고자 한다. 지금 당이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기에 과거는 쉽게 수정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을 끊임없이 말살한다. 잊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고 필요한 순간에만 기억에 떠올리곤 다시 잊어버린다. 그래서 기억하던 과거가 달라져도 혼돈이 없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의식을 바꾸어 모순점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게 당이 만들어낸 ‘이중사고’라는 신어의 의미다. 이중사고는 결국 자신이 거짓을 말했거나 발견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과정이다.


‘기록국’의 수정 작업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 신문은 당연하고 책, 잡지, 팸플릿, 포스터, 영화, 만화, 사진까지도 매일 매 순간 과거는 현재에 맞게 고쳐진다. 현재에 맞지 않는 과거는 깨끗이 지워지고 사라진다. 이전의 과거 자료는 모두 아궁이 같은 ‘기억통’ 속으로 버려져 폐기되기에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걸 증명할 수도 없다. 오래전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믿은 선구적 과학자들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던 것처럼 1984년엔 과거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진실이 무엇인지 혼돈스러운 미래의 모습은 오늘날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진 이후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세상에서도 진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1984>의 세상에서는 과거를 지워 없애버리지만,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버전(Version)의 과거가 존재함에 따라 과거를 잃어버리고 있다. 미디어가 확장되고 개인화되면서 사실이 아닌 뉴스와 정보가 넘쳐나 진짜 과거는 어디에 존재하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시도도 마찬가지다. 진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는 부족하고 새로운 과거를 증명하는 증거를 만드는 건 너무나 쉽다.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당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사람들의 생각 자체를 지배하고자 한다. 신어는 어떻게 보면 매우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좋다(good)라는 단어와 유사하거나 반대되는 단어는 매우 많지만 그걸 단순화한다. 좋다(good)는 의미를 강조하려면 더좋다(plusgood), 더욱더좋다(doubleplusgood)면 충분하다. 탁월하다(excellent)거나 훌륭하다(splendid)는 표현이 필요 없다. 반대말은 안좋다(ungood)이면 된다. 


결국, 신어 사전에는 다른 단어들이 모두 사라지고 좋다(good) 한 단어만 남게 되는 것이다. 단어수는 대폭 줄어들고 사고의 폭은 더욱 감소한다. 그게 당이 노리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기록들도 신어로 표현하면 더욱 조작하기 편해진다. 셰익스피어의 문학 작품을 신어로만 표현한다고 상상해보라. 그 감정과 생각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을까?


당이 신어를 개발하려는 것은 사람들이 당에 보여주는 열정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보여주는 것은 의식에 차원에 있으나, 당이 지배하려는 것은 각자의 내면에 숨어있는 무의식이다. 그래서 사상의 정통성은 무의식에 있다고 여긴다. 의식에 있는 것은 사상경찰과 텔레스크린을 통해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무의식에 있는 것은 찾아내기 어렵지만 당은 그 방법을 연구하고 있고 결국 알아낸다. 


윈스턴의 위험한 생각도 그래서 발각된다. 그리고 발각되어 처벌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의식까지 개조되는 아주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게 된다. 고통이란 건 몸과 마음이 정상적이지 못한 상태일 때 뇌가 보내는 신호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타인에게 그런 의미 있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위한 고통만을 주기도 한다. 단순히 생각하는 것을 토설하게 하는 고통에서 그치지 않는다. 의식의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무의식의 세계까지 지배하려 든다. 엄청난 고통을 주는 고문을 통해서. 



“진짜 목적은 성행위로부터 얻게 되는 모든 쾌락을 사전에 제거하려는 데 있었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사랑보다 더 죄가 되는 것은 성욕이었다”


자유를 억압하는 체계 속에서 남녀 간의 육체적 쾌락은 당연히 금지되어야 한다. 결혼은 당에 봉사할 아이를 갖기 위한 것이며, 성교는 마치 관장을 하는 것처럼 역겨운 행위로 간주되었다. 만족을 위한 성행위는 반역이고 사상죄에 해당된다. 두 남녀가 서로의 몸에 이끌린 듯한 인상을 보이기만 해도 위험했다. 그런 그들에게는 결혼이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이 하층민 노동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들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의 분출구 역할을 할 수 있는 매춘이 암암리에 장려되고 있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한 빈민과 하층민 출신들의 일탈은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어느 날 윈스턴은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낯선 여자에게서 작은 종이쪽지를 받는다. 그녀는 과감하고 용의주도하다. 윈스턴과 마주치기 직전 텔레스크린 앞에서 몸이 아픈 듯 흔들리고 그가 그녀를 돕게 한다.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려는 순간 그의 손에 종이쪽지가 넘겨진다. 쪽지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사상경찰이 그의 마음을 떠보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사상경찰과 텔레스크린의 눈과 귀를 피하기 위해 스파이처럼 움직이고 마침내 어느 한적한 시골 숲 속에서 만나게 된다. 마이크를 숨길 수 있는 큰 나무나 수풀이 없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교감한다.


그녀의 이름은 줄리아다. 겉보기엔 정말로 당에 충성하는 당원이다. 2분간 증오 때마다 가장 앞장서서 큰 소리로 반역자들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고, 일주일에 사흘은 청년반성동맹을 위해 자발적으로 일 할 정도다. 


그녀는 윈스턴의 얼굴에서 당의 충복이 아님을 금방 알아챘다고 한다. 다른 내부 당원들과도 수십 번이나 이런 일을 해봤다고 했다. 그녀는 순결을 증오하고 도덕 같은 것들을 바라지 않는다. 본능에 끌린 순수한 욕망을 갖고 있고 상대가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신은 쾌락을 원할 뿐이며 그걸 방해하는 당의 규칙이 싫을 뿐이다. 윈스턴은 그녀의 그런 태도야 말로 당을 산산이 부숴버릴 수 있는 힘이라 생각하고 그녀와의 만남을 즐긴다. 이 둘의 행동은 본능에 가까운 사랑의 행위이지만 동시에 당에 치명상을 입히는 정치적 행동이다.


<1984>에서는 결혼은 단지 아이를 낳기 위한 거다. 남녀 간의 쾌락은 허용하지 않는다. 성행위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기에 누군가를 욕하거나 저주하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힌다. 당은 그런 상태를 용납할 수 없다. 성욕의 에너지를 소리 지르고 행진하고 깃발을 흔드는데 쏟아내길 바란다. 


<멋진 신세계>에서의 지배 방식은 이와 정반대다. ‘만인은 만인의 연인이다’라고 할 정도로 남자는 다수의 여자와 여자는 다수의 남자와 쾌락을 즐기는 것이 허용된다. 아니, 그게 장려되고 그것에 적극적이지 않으면 오히려 의심받는다. 그리고, 남녀 간의 관계를 통한 아이 낳기는 매우 부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인공수정 방식으로 생명이 만들어지고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 관여하기 위해 부모의 존재와 역할 자체를 없애 버렸다. <1984>에서도 아이를 인공수정으로 낳고 공공기관에서 키우는 방식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저는 현실 속에 있어요. 확실하고 단단하게 살아 있다고요. 당신은 살아 있다는 게 좋지 않으세요?”


줄리아는 1984년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 조르바>다. 그녀에겐 에너지가 넘친다. 자신의 몸을 적극적으로 느끼며 살아있음을 즐긴다. 생각도 단순하다. 본능에 충실하려 하고 본능에 따라 살려고 하고 그 외의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당에 들키지 않고 안전하게 원하는 걸 얻는지 잘 알고 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만 최대한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언젠가 사상경찰에게 붙잡혀 처형당할 것이란 생각을 숙명처럼 하고 있지만, 자신이 선택한 방식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반면, 윈스턴의 내면은 암울하다. 당의 규칙에 어긋나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순간부터 죽은 목숨이라 생각한다. 그는 삶이나 죽음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은 고물 잡화점 건물 뒤에 있는 작은 방을 그들만의 아지트로 정한다. 줄리아는 윈스턴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걸 갖고 온다. 내부 당원들만 갖고 있는 진짜 설탕과 진짜 커피와 홍차, 흰 빵과 신선한 우유 같은 것들이 그를 감동시킨다. 같이 나눠 먹으며 우주 속 먼지 같은 작은 자유를 찾고 누리려 애쓴다. 하루는 그녀가 그를 위해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렸다. 작은 변화만으로도 그녀는 눈에 띄게 예뻐 보이고 여성다워 보인다. 마치 내일이면 총살을 당할지 모르는 암울함을 생각의 뒤편으로 미뤄둔 것 같다.


윈스턴은 아직 당에 충성을 바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가진다. 당은 인간의 단순한 충동이나 감정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당원들에게 주입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조차 그들에겐 방해물일 뿐이다. 그래서 당원들의 자식들이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만들고 이상한 행동이나 대화를 보고 들으면 사상경찰에게 신고한다. 반면 노동자들은 아직 이런 상황 속에 살고 있지 않기에 희망이 있다. 그들에겐 국가나 이념보다 그들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윈스턴은 노동자들을 더 이상 경멸하지 않는다. 그들이 미래 언젠가 생명력으로 가득한 세계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결국 윈스턴과 줄리아는 그들의 아지트에서 체포된다. 고문 현장에는 오브라이언이 있다. 그는 윈스턴을 7년간 관찰해왔음을 밝힌다. 그리고 윈스턴을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그에 대항하는 윈스턴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모든 것을 자백하더라도 줄리아를 사랑하는 마음은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윈스턴과 같은 인간을 수도 없이 다뤄보았던 오브라이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극심한 고통과 심문이 계속된다. 그는 일기에다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자유다’라고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온몸을 관통하는 고통 속에 그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과거 종교재판과 전체주의의 탄압 아래 순교했던 많은 이들이 있었지만, 윈스턴의 고통은 순교로 이어질 수도 없다. 그에 대한 기록은 모두 지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당의 방식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는 식이다. 누구에게나 자유 의지가 있으며 그 의지에 따라 당에 충성해야 한다. 단순히 고통을 주거나 처형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장악함으로써 새사람으로 만든다. 그렇게 모든 이들의 정신을 지배함으로써 당은 권력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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