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스인 조르바>는 세상 누구보다도 생생한 삶을 살았던 한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언제나 본능에 충실했고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몸과 영혼은 결코 따로 노는 일이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의 이성이 그것을 방해하지 못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화자인 ‘나’와 조르바의 운명적 만남은 바닷가 항구의 지저분한 카페에서 이루어진다.
이제 생각보다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고 있던 그에게 조르바가 다가온다. 그는 키가 크고 몸이 가는 60대 노인이지만 불길 같은 강렬한 눈빛을 가졌다. 크레타로 간다는 말에 다짜고짜 자신을 데려가 달라 요청한다. 타당한 이유를 갖다 대진 못하지만, 당신은 생각지도 못할 수프를 만들 줄 안다며 감정에 호소한다.
나는 그런 조르바가 싫지 않다. 시원시원하고 거침이 없는 말투에서 나는 조르바의 품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조르바는 동행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분명히 해두자고 한다.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오.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란 걸 이해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조르바는 자유를 위해 금욕을 실천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남다르다. 본능을 억제할 줄 모르지만 극복해야 할 무언가가 있으면 오히려 죽도록 부딪쳐서 지겨워지도록 만든다.
“어렸을 때 한 번은 버찌에 미쳐 있었어요. 하지만 돈이 있어야지요. 조금씩만 먹으면 점점 더 먹고 싶어 지는 거예요. 밤이고 낮이고 버찌 생각만 했지요. 어느 날, 버찌가 날 데리고 논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한 줄 아시오? 아버지 주머니를 털고 시장으로 달려가 버찌 한 소쿠리를 샀지요. 그걸 단숨에 입에 처넣었어요. 배가 아프고 구역질이 나서 결국 몽땅 토했어요. 그날부터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중략) 이게 자유를 얻는 도리올시다.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조르바에게 삶은 육체다.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 가엾게 여겨야지요. 육체에 먹을 것을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요.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것이오!”
그래서 그는 매일 저녁 맘껏 먹고 마신다. 먼저 배를 채워놓고 그다음에 생각해 보자고 두목을 보챈다. ‘부처’의 철학에 빠져 육신의 쾌락을 업신여겨 왔던 나(두목)는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조르바의 말에 생각이 바뀐다. 식욕은 성욕과도 통하는 법이다. 맛있게 먹다 보면 늙은 암탉이 수작을 걸어올 꺼라며 자신은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먹고 마시며 과부를 유혹한다.
갈탄 광맥을 찾고 갱도를 파는 일을 하면서 나와 조르바는 밤마다 얘기를 나눈다. 종이와 잉크에서 벗어나고픈 나는 조르바가 이제까지 세상에서 겪은 이야기들이 너무 궁금하다. 밤마다 이야기가 이어지고 대화는 깊어진다. 조르바는 꽃 핀 나무, 냉수 한 컵을 보고도 놀라며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한다.
<어린 왕자>에서 삶에 대해 궁금한 모든 것이 꽃 한 송이, 물 한 모금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한 번은 포도주 몇 잔을 마시면 간덩이가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하느님께 시비를 건다며,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궁금해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 세상이 다시 태초의 신선한 활기를 되찾는 기분을 느낀다. 지겨운 일상사가 우리가 하느님의 손길을 떠나던 최초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두목은 크레타에서 처음으로 먹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깨닫는다. 먹고 마시면서 조르바와의 대화는 생기를 더해 간다. 마침내 그는 먹는다는 것이 숭고한 의식이며, 고기, 빵, 포도주는 정신을 만드는 원료임을 알게 된다. 조르바와 함께 생활하고 얘기를 나누면서 그의 삶을 부러워한다. 자신이 배우고 공부한 것을 모두 지워버리고 조르바라는 학교에서 모든 것을 다시 배우고 싶다.
자신보다 조르바가 진리에 보다 가까이 가 있다고 느낀다.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모른다. 세상은 항상 그대로인데 머리로만 이해한 자들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다고 한탄한다. 주어진 삶을 선물처럼 기쁘게 살아내지 못하고 분석하고 해석하여 쪼개어 버린다. 그들에게 삶은 하나의 완전체가 아니다. 그런 인생을 돌아보면 미적지근하고 모순과 주저로 점철되어 있다. 허망함으로 가득하다.
조르바 같은 자에겐 하느님과 광산, 그리고 과부가 머릿속에서 아무런 모순 없이 조화롭다. 여자와 잘 수 있는 사내가 자 주지 않으면 큰 죄를 짓는 거다. 여자가 잠자리를 함께 하려고 부르는데 안 가면 자네 영혼은 파멸을 면하지 못한다고 여긴다. 여자는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도 한숨을 쉴 것이고, 자기가 아무리 잘한 일이 많아도 그 한숨 하나면 지옥행이다.
“나는 행복했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갑자기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크레타 섬의 생활에서 나는 행복감을 실감하고 있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의 두뇌는 원형의 머리에 갇힌 채 쉬고 있다. 대신 비를 맞는 대지의 속삭임과 입놀림, 그리도 미동까지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다. 비가 내리면서 씨앗이 싹을 터뜨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행복이란 포도주 한 잔, 밥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닷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임을 깨닫는다. 필요한 건 그뿐이었다.
광산의 갱도가 무너지는 사건을 겪고도 나는 크레타에서의 삶이 행복하다.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랑하며 사는 것. 크리스마스 잔치에 들어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자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을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갑자기 인생은 마지막 기적을 이루어 동화가 되어 버렸음을 깨닫는 것”
그러다가도 가슴속에 밀려오는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인간의 가슴은 피로 가득한 도랑. 세상을 떠나버린 내 사랑하던 사람들은 이 도랑에 몸을 던져 피를 마시고 소생한다. 더 깊이 사랑하던 사람일수록 더 많은 그대 가슴의 피를 마시고.”
“하느님은 있습니까? 있어요, 없어요? 두목,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없는 걸 그렇게 떠들어 댈리는 없겠지만, 있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나는 하느님이 나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니외다.”
조르바는 하느님이 있다고 해도 자비심 많고 관대한 분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 보잘것없는 인간의 죄를 하나하나 심판하지는 않을 것이며, 주어진 본능대로 살아온 인간을 지옥불에 던져버리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나보다 좀 더 크고 힘이 세고 나보다는 돌아도 좀 더 돌았겠지요. 부드러운 양피 무더기 위에 턱 앉아 하늘을 집으로 삼고 있겠죠. 오른손에는 칼이나 저울 같은 걸 들고 있는 게 아니고 꼭 구름 같은 스펀지 한 덩어리를 들고 있을 거예요. 오른쪽에는 천당, 왼쪽에는 지옥, 이윽고 혼령이 하나 들어옵니다. 가엾게도 이 불쌍한 것은 오들오들 떨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걸 보시면서 팔 소매로 웃음을 가리고 요괴 역을 연기하십니다. 이렇게 호령하시는 거죠. 이리 오너라, 이 거지 같은 자슥아!
이윽고 하느님은 심문을 시작합니다. 발가벗은 혼령은 하느님 발 앞에 몸을 던지고는 애걸복걸합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저는 죄를 지었나이다. 혼령은 자기 죄를 밑도 끝도 없이 조목조목 얘기합니다. 하느님은, 이건 심해도 너무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품을 합니다. 그리고는 꾸짖으십니다. 제발 그만둬! 그런 소리라면 신물이 나도록 들었다. 그리고는 물 묻은 스펀지를 쓱싹쓱싹 문질러 죄를 몽땅 지워 버리시고 혼령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천당으로 썩 꺼져라. 베드로야, 이 잡것도 넣어 줘라!”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낸 나무 조각도 성물이 될 수 있습니다. 없으면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중략) 이건 옳다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을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그의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은 말 한마디 없이 침묵하고 있어요.”
조르바의 생각이 비록 논리적이지 않고 매끄럽지 않지만 더할 나위 없이 거칠고 대담하여 반박하기 어렵다. 최선을 다해 진실되게 살아본 자만이 말할 수 있는 얘기다. 그에게 머리로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끓는 피를 갖고 있다면 팔과 가슴이 움직여야 한다. 조르바에게 옳고 그름, 맞고 틀림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두목, 겁나는 게 무언고 하니 나이 먹는 것이에요. 하늘이 우리를 지키소서! 죽는다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끽하고 죽고 촛불이 꺼지고, 뭐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나 늙는다는 건 창피한 노릇입니다.”
조르바에게도 두려운 게 있다. 죽는 건 그냥 떠나는 것이지만 늙는 건 창피하다.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창피한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창피하다. 그래서, 술 마시고 취해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도 주저앉지 않고 춤출 때 등이 아파도 아무렇지 않은 듯 뛰어다닌다. 살다 보면 ‘꽈당’하고 넘어질 때가 있겠지만 조르바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래다. 밤이고 낮이고 전속력으로 내달으며 신명 나는 대로 한다.
인간이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그는 믿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동물과 구분하고 신에 가까워지기 위해 그런 신화를 지어내었지만 실제 인간의 모습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잔인하다. 밑도 끝도 없는 옳고 그름, 아군과 적군을 나누어 얼마나 많은 인간을 살상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간이면 누구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누구의 마음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죽어서 묻히고 구더기 밥이 된다.
조르바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한 형제다.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