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수 Aug 21. 2019

<갈매기 조나단>처럼

날아 보고 싶다.


조나단은 다른 갈매기와 다르다. 동물적 본능에 따르는 갈매기 무리는 가까이하지 않는다. 내면의 자신의 목소리에 따른다. 매일매일 먹을 것을 찾기에 여념이 없는 다른 갈매기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날개를 통한 비행의 즐거움에 일찍 눈을 떴다. 


조나단은 무리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중하며 깨달음을 얻는다. 사실, 이 정도면 갈매기들 중에 천재라 말할 수 있겠다. 다른 갈매기와 다른 DNA를 물려받은 것은 물론이요, 갈매기 사회의 질서에 도전하는 그 정신도 대단하다. 하지만, 출발점에서부터 대단했던 건 아니다. 그냥 자기 자신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조금씩 더 알고 싶었다.



“전 다만 제가 공중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할 수 없는지 그게 알고 싶은 거예요”


조나단은 동족 갈매기와 달리 먹고사는 것에만 집중할 수가 없다. 혼자만의 비행을 즐긴다.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 바다로 수직 비행을 하며 자신이 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내려 애쓴다. 고속으로 수직 하강하다 바다에 부딪히기 직전 날개를 비틀어 다시 수평 비행으로 전환하는 연습을 하기도 한다. 원하는 비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몸이 갑자기 고꾸라지며 다른 갈매기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한밤중 어두운 바다에 빠져 겨우 목숨을 건지기도 한다. 


그런 조나단의 모습은 부모에게조차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 남들처럼 먹을 것을 찾고 생존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느냐고 다그치지만 조나단은 그럴 수가 없다. 


혼자만의 연습으로는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자신이 확신했던 그 비행이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하지만, 절망적인 순간에 깨달음이 다가온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다시 자신만의 비행을 위한 힘을 얻는다. 


하루는 수직낙하 비행을 하다 방향을 제어하지 못한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그는 너무나 위험하게 갈매기 무리 속을 지나게 된다. 다행히 다친 갈매기는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그는 갈매기 무리에서 쫓겨 난다. 조나단은 이해할 수 없다. 속도의 한계를 깨뜨리고 새로운 삶의 영역을 개척한 그를 칭찬하지 못할지언정 무모하다는 이유로 외로운 생을 살도록 추방한 것이다.



“삶이란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오래도록 먹고살기 위해 이 세상으로 보내졌다는 것 외에는 알려져 있지도 않고 알아낼 수도 없는 것이야” 


원로 갈매기의 이 말은 매우 엄숙하나 결국 스스로를 한계 짓는 말이었기에 공허하다. 자신이 가진 날개는 분명 자연선택의 과정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갈매기라는 종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 날개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는 무리의 선택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갈매기나 우리 인간이나 스스로의 한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특히, 무리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는 가급적 없애려 한다. 한 마디로 그건 위험요소이기 때문이다. 무리가 살아온 방식을 변화시키는 건 어떤 것이라도 위험할 수 있다. 


더구나 동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본능만으로 살아가는데 본능과는 다른 길을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여러 번의 빙하기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동물들은 무리 중의 일부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것을 시도한 덕분이다. 물론 자연선택 과정을 ‘시도’라고 말하긴 어려울 수 있지만 크게 보면 작은 도전이 생존을 가능하게 했다.



저는 날고 싶어요”


무리에서 쫓겨난 이후 조나단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갈매기들을 만나게 되고 더 높은 차원의 비행을 배우게 된다. 그는 어느 갈매기보다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행은 그에게 자유를 의미하고 비행을 통해 기쁨을 느끼고 행복을 느낀다. 더구나, 그의 배움은 비행의 완벽함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비행하는 이유는 자신의 무리에게 주어진 삶과 자신의 날개가 가진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니까. 결국 그는 강한 열정과 오랜 시간의 노력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는 방법을 깨우치게 된다. 


그 깨달음의 순간에 그는 자신의 삶이 다른 갈매기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이제까지는 자신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인정해주지 않는 무리를 배척하였다. 하지만 배움의 과정 속에서 자신을 쫓아낸 갈매기 무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홀로 배우며 진실을 깨닫기 위해 어려움을 겪었던 예전의 자기 자신을 생각하며 그 무리 속에 자신과 닮은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자신이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을 전해주고 싶다. 그가 비행을 배우기 위해 시도했던 많은 시행착오들이 새로운 도전자들에게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동지들의 무리를 떠나 과거의 무리에게로 돌아가고 과거의 자신과 닮은 제자를 만난다. 조나단이 그에게 묻는다. 너는 날고 싶으냐?” 이때 플레처가 순수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네, 저는 날고 싶어요” 


이 한마디는 그가 과거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를 찾아온 제자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다. 이 순간 갈매기는 더 이상은 그냥 먹고사는 것에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거나 할 수 없다, 또는 그것을 원한다 원하지 않는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존재해야만 한다는 데에 눈을 뜬 것이다. 설령 그가 그런 유전자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각성하게 된 것이다. 


조나단의 비행은 높이 날아 멀리 보기 위한 비행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 안에 내재된 것을 찾아내는 비행이다. 멀리 보는 비행은 항상 불안하다. 어디서 무엇을 만날지 알 수 없고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두렵다. 그래서,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다. 


자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면 멀리 볼 필요가 없다.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목소리에 따르면 된다. 그래서 조나단은 용감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힘들 때마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믿는다. 삶에서 가장 원초적인 먹이를 구하는 일보다 자신의 날개를 사용해 비행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은 알고 있다. 그 판단의 결과는 성장이다. 꾸준히 끊임없이 성장하고 마침내 누구보다 더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때 깨닫고, 다른 이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두 과정이 달라 보이지만 깨달음이 삶의 지평을 넓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다른 쪽으로 생각이 확대된다는 점은 똑같다. 조나단은 비행에 있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수준에 도달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것만으로 삶이 완성되고 완벽해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건 굉장히 외로운 일이다. 그 기쁨과 깨달음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혼자서 높은 산을 정복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고 정복했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의 희열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그 사실을 혼자만 알게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스승과의 만남을 통한 배움과 제자와의 만남을 통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단순한 비행 노하우의 전달이 아니다. 교감을 통해 스승과 제자는 서로가 성장하고 각자의 삶이 더 풍요로워짐을 느낀다.

작가의 이전글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