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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막 일장 Jan 28. 2019

연극 <그을린 사랑>

잿더미 속에서 타지 않은 그것, 사랑

6년 만에 돌아온 연극 <그을린 사랑>

새로운 연출과 무대로도 빼어난 작품성 증명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너를 사랑할 거야." 나왈의 약속은 2012년 이후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마음을 울리며 무대 위로 울려 퍼졌다.


연극 <그을린 사랑>이 2018년 12월, 다시 돌아왔다. 연출부터 무대 디자인까지 새롭게. 초연을 인상 깊게 봤다면 초연과는 전혀 다른 이번 공연이 꽤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또 상대적으로 아쉬운 점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떤 무대여도 작품성 자체는 뛰어나며, 결국에는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는 것이다.


<그을린 사랑>은 어머니 나왈이 남긴 유언에 따라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형제에게 편지를 전해주려고 하는 시몽과 잔느 두 남매가 여정 중에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는 내용의 연극이다. 2010년 드니 빌뇌브 감독이 영화로 연출했으며, 한국에서는 201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은 故 김동현 연출이 연출했다. 이번 공연은 신유청 연출이 연출을 맡았으며, 서울문화재단 '2017년 창작예술아카데미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오직 대사에만

레바논 내전의 참상을 강렬한 영상을 통해 충격을 안긴 영화나 음악을 통해 감정을 극대화한 초연과 달리 이번 공연에서는 감정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최대한으로 절제하고자 했다. 무대의 경우 문자 그대로 텅 비어있었다. 오직 최소한의 소품과 검게 칠해진 벽과 바닥으로만 이뤄졌다. 무대 음악은 침묵의 무게와 시간을 강조하려는 듯 드물게 사용됐다. 결국 무대 위에 남은 것은 배우의 '연기'와 '대사'였다. 연기와 대사에 집중하게 하기 위해 그 외 모든 것은 절제되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가 황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빈 무대를 채워나간 것은 배우들의 치열한 연기와 한 마디도 놓칠 수 없는 대사였다. 


나왈은 왜 침묵하게 되었는가

어느날 갑자기 나왈은 입을 다물었다. 한 번 입을 다문 그녀는 죽을 때까지 침묵을 지킨다. 그녀는 왜 침묵하게 되었을까?

침묵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충격 받은 나머지 할 말을 잃어 침묵하거나 자신의 말에서부터 비롯되는 파장을 막고자 침묵하거나. 나왈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침묵을 선택했다. 오래전 아들을 향해 거듭 다짐했던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너를 사랑할 거야."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처럼. 사랑과 동시에 증오도 타올랐지만 증오보다 큰 것은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자기 안의 증오와 고통을 기꺼이 삼킨다. 증오와 고통을 삼킨 후에도 어느 순간 튀어나올까 타오르는 아픔 속에서도 눈빛이 흐릿해지지 않게 몸부림쳤다. 나왈에게 침묵이란 사랑이자 약속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언젠가 밝혀질 수밖에 없는 진실

나왈은 끝까지 자기 혼자만 진실을 안 채 입을 다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침묵이 언젠가는 깨져야 함을 자각했다. 침묵은 영원할 수 없다. 진실 또한 영원히 묻을 수 없다. 그 진실을 잔느와 시몽 두 남매가 스스로 깨달으며 침묵을 깨주길 바랐다.

침묵이 깨지기까지의 시간은 길었다. 시몽은 나왈을 증오한 나머지 유언 집행 자체를 거부했고 잔느는 침묵의 이유를 알고 싶어하지만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헤맸다. 그렇지만 나왈이 남긴 노트를 읽으며 시몽은 증오를 멈추고 형을 찾아내기로 한다. 잔느는 나왈의 흔적이 남은 곳과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진실에 한 발짝씩 다가간다. 

마침내 진실 앞에 다가가게 된 두 남매는 1+1이 2가 아니고 1임을 깨닫게 된 순간 나왈이 처음 그랬듯이 입을 다물게 된다. 진실에 대한 충격이 두 남매를 가장 먼저 찾아갔다면, 그 다음으로 그들을 찾아간 것은 바로 증오를 멈추게 하는 사랑이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진실과 마주하며 그 속에 가려진 나왈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충격적인 진실보다 더 강렬한 사랑

진실의 실체는 객석까지 침묵하게 했다. 그런데 오로지 '나왈을 침묵하게 한 진실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초점을 맞췄다면 연극은 자극적인 연극으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반전을 다 알고도 식상하게 다가오기보다는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나왈의 의지가 굳건한 사랑으로 관객에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나왈은 반복적으로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사랑할 거야." 누구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도'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연극은 평생을 걸쳐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했던 나왈의 모습을 비추며 사랑의 강인함과 위대함을 말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져야 할 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위협당할지도 모르는 전장을 누빌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침묵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고통에도 사랑을 지키고픈 마음과 약속이 있기에 가능했다. 나왈의 삶 전반은 사랑과 약속이 지탱했다.


초연의 아우라에 눌리지 않는 열연

초연 당시에는 3명의 배우가 10대, 40대, 60대의 나왈을 연기했다면 이번 공연에서는 1명의 배우가 어린 시절의 나왈부터 노년의 나왈까지 연기했다. 이주영 배우는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사랑과 약속을 지키려는 나왈을 연기하며 묵직하게 진심을 전달했다. 그녀의 열연이 없었다면 연극의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잔느와 시몽 두 남매를 맡은 나혜진 배우와 이원석 배우 또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으며, 나왈의 할머니 및 사우다 역의 송희정 배우는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발산했다. 동시에 이주영 배우와의 조화로운 연기를 통해 여성 간의 강한 연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다. 진실을 여는 열쇠를 쥔 아부 타렉 역의 백석광 배우는 광기 어린 예술가적 모습을 보이며 극에 긴장감을 안겼다.


나왈이 느껴왔던 침묵의 무게만큼 무대 위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파동을 일으키며 마음을 친다.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하게 다가온 작품의 메시지는 나왈의 마지막 대사만큼 결국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을린 사랑>은 그렇게 긴 시간 속에서도 바래지 않고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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