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나는 이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주인공 용식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행동했는지 서서히 밝혀지는 게 극의 주된 내용이자 핵심이다. 용식의 부모 이야기와 용식의 친구 강호와 예리의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되는데, 그런 전개가 용식을 더욱 이해하게 도와준다. 전반적으로 설득력 있게 이야기가 전달되었으며,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짜인 극이라고 생각한다.
청소년 부모가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기엔 세상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뉴스로 접했기에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강호와 예리를 보며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극은 두 인물의 미래가 그래도 괜찮을 것이라는 여지를 남긴다.
괜찮을 것이라는 여지는 용식에게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극의 제목 <날아가 버린 새>에서 ‘날아가 버린’이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을) 붙잡지 못해 날려버린’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가정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날아가 버린, 혹은 날아가고 싶은’ 의지와 마음이라는 능동적인 의미로 바뀌어 다가왔다.
아이를 키우고자 하는 강호와 달리 용식은 낙태하라고 거듭 말한다. 용식이 유난히도 그랬던 이유는 강호와 예리의 미래가 자신의 부모와 같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절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나면 안 됐는데 왜 태어난 거니?” 용식은 이 말을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들어오면서 부모로서 무책임하게 굴 거면 차라리 자기를 낳지 말지 왜 낳았냐고 원망했을 것이다. 동시에 나의 현재와 미래에 답이 보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에 강호와 예리를 비춰보며 비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강호와 예리는 (아이의) 심장이 뛰니까, 살아있으니까(이 대사를 강호가 먼저 하고, 나중에 용식의 어머니가 해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라는 이유로 아이를 낳기로 한다. 철이 없어서 그런 말을 쉽게 하는 거라고 삐딱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강호와 예리가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어쩌면 가정 폭력이 만연한, 혹은 가정답지 못한 가정에서 벗어난 가정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낙태를 고민하다가도 아이를 지우는 것이 태어나지 말아야 했다고 비난받은 자기 자신을 지우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져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것은 아닐까? 무대 위에 존재하다가도 막이 내리면 사라지는 인물들이지만 진심으로 두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강호와 예리, 두 사람을 볼수록 용식이 왜 낙태라는 말을 꺼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안타까웠다. 용식은 두 사람을 보며 자신의 부모도 저랬다면, 적어도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화도 나고 속상해서 더욱 아이를 지우라고 강요한 것 같다.
현재도, 미래도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아 용식은 본드로라도 달아나고자 한다. 힘겨운 나머지 어쩔 줄 모를 때 용식은 죽을 거 같아 비닐봉지를 머리에 뒤집어쓴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용식에게 남은 것은 없다. 엄마도 차마 붙잡을 수 없어 괜찮다며 엄마를 엄마가 아닌 ‘박미리’로 떠나보낸다. 그런 용식이 위태로워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이제 용식도 용식만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용식도 그저 멀리 날아가 자신만의 둥지를 만들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싶었다.
<날아가 버린 새>의 무대는 보통의 연극 무대와 달리 가로로 길었다. 그 무대 위에서 인물들은 뒤로 달아날 수 없고 오직 좌우로만 갈 수 있다. 그런 무대가 확 밀치면 중심을 잃고 고꾸라질 수 있는 인물들의 삶을 묘사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동시에 무대는 현관문 밖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집의 모습을 가로로 늘어놓은 것 같았다. 그런 무대는 용식의 부모가 과거에는 강호와 예리의 현재와 같았을지도 모름을, 강호와 예리의 미래가 용식의 부모의 현재와 같을지도 모름을 암시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