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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막 일장 Jun 24. 2021

연극 <액트리스 원: 국민로봇배우 1호>

60분, ‘인간다움’을 고찰하는 시간

이 연극은 2029년을 배경으로 하지만 머지않은 시일에 당장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동명 연출의 작 <액트리스 투: 악역전문로봇>이 다소 먼 미래의 이야기로 다가왔다면, <액트리스 원: 국민로봇배우 1호>(이하 <액트리스 원>)는 연극이 존폐 위기에 놓였다는 등 언젠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다뤘기에 무섭게 느껴졌다.


<액트리스 원>은 사람이 아닌 로봇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인간다움’은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그것을 학습으로써도 표현할 수 있다면 로봇이라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액트리스 원이라는 로봇은 배우 성수연의 연기를 기반으로 한 데이터를 통해 인간 못지않게 감정을 표현한다. 처음에는 다소 과장되게 연기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연기하기 시작한다. 액트리스 원이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할수록 관객의 로봇 배우에 대한 거부감과 편견은 점점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로봇 배우를 향해 박수를 보내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됐을 것이다. 그런 관객을 보며 어떤 배우들은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배우 성수연의 손녀 성수지를 들 수 있다.


성수지는 배우 성수연만큼 연기를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오디션에 떨어졌는데, 액트리스 원은 붙었다.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괴감은 힐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성수지는 액트리스 원에게 말한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연기한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나는 자의식이 있다. 하지만 너는 아니다. 인간에게는 있지만, 로봇에게는 결여된 무언가가 오히려 로봇이 똑같이 복사한 듯 감정을 연기하게 할 수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연기를 잘한다는 말은 곧 나 자신을 지워버리고 연기하고자 하는 인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을까?


한 배우가 액트리스 원에게 혐오 발언을 하자 노배우가 그를 꾸중하며 말한다. ‘배우’에서 ‘배’는 사람이 아닌 존재를, ‘우’는 근심을 뜻한다. 즉 ‘배우’는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을 고민하는 존재이다. 성수지와 노배우의 발언을 함께 두고 본다면 나 자신을 지우고 다른 누군가의 행동과 감정을 고민하고 표현해내는 로봇 배우는 결국 본질적으로 배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60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의미 없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계속 ‘로봇에게도 감정이 있을까? 감정이 있다면 학습을 통해 습득한 걸까? 그렇다면 그 감정은 오직 로봇 자신만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연극에서 액트리스 원은 아마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 것 같다. 한 가지 예를 먼저 든다면, <한여름 밤의 꿈>에서 보텀으로서 말할 때 짜릿함을 느꼈다고 했는데, 그 감정이 인간이 느끼는 성취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감정이 없다면 ‘인간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햄릿>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것은 인위적인 학습을 통해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액트리스 원>은 1인극이다. 그만큼 배우의 역량에 많은 것을 기댈 수밖에 없는데, 배우 성수연은 로봇 ‘액트리스 원’으로서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해설자’로서도 힘 있게 연극을 이끌어냈다. 배우이자 이야기꾼으로서 배우 성수연 배우가 지닌 힘에 다시금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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