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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ofs Oct 10. 2024

[장편소설] 붉은 눈 -9- 1부 완료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북한은 독재이고 총통은 독재가 아닌가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1차 체류일정의 마지막 날이었다. 정엽은 시후와 차를 움직여 공단으로 향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보다 흐릿한 윤곽이 조금씩 분명해지고 자신의 시야가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어두운 공간에 들어섰을 때 망막세포가 반응해 뇌에 신호를 내리는 것처럼 완벽하지 않지만 명암은 구분되는듯했다. 무정부 상태처럼 보이던 이곳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고 운영되는지. 공단 주변으로는 도시가 확장되고 있었다. 임시정부라고 하지만 기본적 행정서비스는 김정일 시대와 차이가 없다. 공단에서 나오는 돈은 주변에 퍼져 지역일대의 생기를 불어넣고 거래를 늘린다.물론 그 돈은 달러다. 위안화도 쓰이기는 하지만 달러가 우선이다. 시장에는 새로운 물건이 넘쳐난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고 늘어난 소득이 수요를 만들어 낸다.


 돈이 된다고 하면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밀수도 한다. 그렇게 몇 년간 소득을 불린 이들은 사람을 부려 부를 늘려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자연스러운 규칙이 만들어지고 자본주의의 질서가 자리 잡게 된다. 인간의 본성과 욕망은 억누를수록 튀어나오는 무의식의 괴물과 같다. 개성에서 그 욕망이라는 괴수가 뛰쳐나올 기회를 만난것이다. 욕망에 잠식당한 사람들이 모여서 혼란을 극복하고 질서를 만든다. 다수가 그것을수용하기 시작하면 곧 사회의 제도와 규칙이 된다. 혼란한 시기가 지나고 사람들은 이제 안정감을 느낄것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어렵게 자리잡은 질서를 누군가 헤집고바꾸려 한다면 필연적으로 반발이 따른다. 질서를 유지해 이익을 얻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자와 변화를꿈꾸는 사람. 이들은 대립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그들은 혼란한 시기 위험을 무릅쓰고 승리를 쟁취했다. 기득권을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이들은 그 특권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벼린다. 그 과정은 반복될 것이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정엽은 러시아 인형이나 프렉탈이 떠올렸다. 지난한 반복의 과정. 이 변화의 열차를 놓친 소외된 이들은 김정일의 통치시절이 좋았다고 떠들어 댈수도 있다. 평화유지군의 점령기간이 끝나고 나면 이곳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새로운 수반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개성일대의 무기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군인들은 다 무장해제를 했고 경찰서의 총기도 다 수거가 됐나요? 창밖을 보며 정엽이 말을 꺼냈다.

 형식적으로는 됐지요. 국지전 이후에 어쨌든 평화유지군이 도착했고 저들은 임시정부를 선포하기는 했으니까요. 군의 일부와 당 세력들은 지금 조용히 협조하는 듯 보이지만 물밑에서 서로 권력을 잡으려고 난리죠.

 뭐 권력의 본질이니까요. 정엽이 말했다.

남은 무기는 구식이라고 해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여기 군부세력과 힘이 있는 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평화유지군 주둔 초기에 일부세력들과 시가전과 총격전이 있었고요. 중요한 것은 이들이 북쪽 사람들한테는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일부로부터는 지지를 받고 있죠. 자본주의와 미 제국주의 몰아내자. 평화유지군은 남조선의 앞잡이다. 뭐 그런 내용들이죠. 이들은 남쪽과 관련 있는 주요시설하고 공단에 대해 적개심을 보입니다. 물론 그 수는 많지 않죠. 이젠 다들 돈이 좋다는 것을 알아버렸으니. 제 생각이긴 합니다만 공단 연구소 폭발과 화재도 이들과 관련이 있지 싶습니다.

조사를 해서 잡아들이면 되지 않나요? 정엽이 슬쩍 물었다.

그게 생각만큼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일단 평화유지군은 수사까지 하기에는 여력이 없고 외국주둔군도 마찬가지죠. 더군다나 주민들은 외국군대에 대해서 반감이 있습니다. 그것도 무시할 수 없는 거죠. 일제 해방 이후로 이런 경우가 처음이지 않습니까. 남한과 자본주의에 대해서 좀 상세하게 알리는 것도 장기적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둘은 어느덧 공단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다 왔습니다. 오늘 가봐야 할 곳이 어디인가요? 아. 서해산업이라고 하셨죠?


공단 삼거리 앞에서 차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정엽은 공단에 들어올 때마다 북한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느낌에 사로잡혔다. 북한도 남한도 아닌듯한 마치 연옥같은 느낌. 건물과 도로 외부의 모습 등은 남한 시골의 한적한 농공단지 같았다. 처음 공단이 들어섰을 때 주민들도 비슷한 인상을 갖지 않았을까. 북한 사람들은 여기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사회심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연구주제가 될 것이다. 서해산업은 공단 외각에 입주해 있었다. 위치를 확인해 보니 폭발한 연구시설과 직선거리로 인접해 걸어서 충분히 다닐 수 있을 듯 보였다. 정문을 통과하자 붉은 벽돌 모양의 건물이 있었고 뒤편에 생산시설로 보이는 거대한 원통의 건물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설의 대표는 일주일에 한두 번쯤 월경을 해 서울로 가는 모양이었고 사전에 연락을 해 놓았기에 곧바로 사장실로 향했다. 김수필은 작업복을 입은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약간 벗겨진 알파벳 M자 모양의 탈모가 있었다. 배가 나왔으며 곱슬머리에 인중이 진하고 얼굴은 둥근 편이었다. 키는 170 정도 되어 보였다. 친근한 인상이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대표는 둘을 접견실로 안내했다.

보시다시피 저희 업체는 규모가 작습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김수필이 말했다. 규모를 따지러 온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굳이 이런 얘기부터 꺼내는 그를 정엽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네, 저는 작은 규모 같다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시설 폭발로 인한 손해가 클 텐데 위로의 말씀부터 드립니다. 정엽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동요하는 눈빛은 없었다.

사업이야 뭐 손해도 보고 이익도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 입주하는 것만도 큰 행운이지요. 참 요청해 놓은 자료는 이미 보내드렸습니다.

네 잘 받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초반 몇 년은 고생이 많으셨네요. 매출이 어느 순간 몇 배가 된 것 같은데 거래처 확보를 잘하셨나 봅니다.

하하, 벌어둔 것 다 까먹는 것 아닌가 공단 접어야 하는 건가 했는데 저희 제품의 품질이 뒤늦게 통했는지.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그러면 뭐 합니까. 공단 연구시설 사고로 자재와 초기 투자금을 많이 날려서 다시 원점이죠. 원인이 파악돼야 책임소재를 묻고 보상이나 배상을 요구할 텐데. 여기서 그게 힘들 것 같습니다. 김수필은 한숨을 쉬었다. 정엽은 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충분히 이해합니다. 재료와 원료가 연구시설에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자료는 다 보내드렸는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는지. 김수필이 말을 꺼냈다.


수사를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해야 하고 아직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요. 공단에 화재가 난 것도 그렇고 누가 폭발을 일으킨 것인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좀 있습니다.

사고가 아니라 고의적인 의도적 테러로 인한 폭발로 보고 계시나요? 자체적으로는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아 그리고 공장과 연구소는 동시에 만들어졌습니까? 연구소에서는 대략 어떤 연구가 이뤄지고 있었는지요. 사장님이 보시기에 폭발을 일으킬만한 재료가 있었습니까? 정엽은 김수필의 의중을 알기 위해서 일부러 여러 질문을 던졌다.

저희야 뭐, 의료용품을 생산하고 있기에 화제에는 늘 대비를 합니다. 화학물질을 활용하기에 언제나 주의하고 있습니다. 다만 연구소를 날릴만한 폭발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 부산물 중에 암모니아와 염소 프로필렌 옥사이드 등 합성 촉매로 사용하기 위한 여러 재료들이 있는데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죠. 그런데 그 규모는 크지는 않습니다. 건물이 통째로 없어질 만한 정도는 아니죠. 화학약품과 유독성 물질이 있기에 공단 안에 설치하는 것보다는 따로 시설을 만들려 했죠. 입주한 지 1년 후쯤 착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물 임상실험장소도 만들었죠. 개성공단이 설립되고 초기에 저도 투자를 한 부분이 있습니다. 달랑 아파트 하나 있는 게 있거든요. 이곳으로 공장을 이전해 생산비도 줄이고 세금혜택도 받으려 한 셈이죠. 가격경쟁력을 더 갖춰야 하니까요. 저는 1차 공단이 설립된 이후 확장할 때 들어왔습니다. 2009년쯤이겠네요.

주로 의약품 재료들하고 원료 배합 진통제용 패치 등을 생산하는 것 같은데 동물실험이 많이 필요한 겁니까? 규모가 상당했나 보네요.

물론이죠. 저희는 엄격한 관리하게 제품을 생산합니다. 남쪽의 생산 기준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동물실험은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대부분의 연구소에 진행되죠. 저희는 연구소 폭발로 많은 자료들을 잃었습니다. 실험용 동물자원도 마찬가지죠. 김수필은 안타깝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협박을 받거나 주민들과의 갈등을 일으킬만한 일들이나 사건은 혹시 없었는지요?   

글쎄요. 공단을 특별히 벗어나거나 하지는 않아서 허가를 받고 개성일대를 관광 삼아 주로 다녀오기는 하는데 가급적 숙소에 있는 편입니다. 물론 주민들도 성향이 좀 나눠져 있어서 공단에 반감을 가지는 부류도 있죠. 자본주의로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 하고 사회주의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인데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특별하게 문제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죠. 물론 직원 모두의 상황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직원 중 의심이 될 만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참, 직접 고용을 하십니까?

초기에는 이곳의 관리위원회를 거친 북쪽 인원들이었죠. 그때는 아직 김정일 체제가 유지 중이었으니까. 당시의 대부분의 인원들은 근무를 합니다. 이후에 추가로 인원을 선발할 때는 저희가 직접 뽑았죠. 뭐 당의 관리인도 그대로니 직접 고용을 한다고 해도 큰 변화는 없습니다.

고용 부분은 왜 묻는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김수필이 말했다.

자본주의 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나 주민이 아무래도 사건에 관여한 것이 아닌가 해서요.

상대적으로 대우가 나쁘지 않으니 초기인원이 거의 그대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여기 일은 할 만하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혹시 저희가 근무자 인사카드나 근무이력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김수필은 협조할 것이라 했다. 정엽이 보기에 그의 관심사는 어쨌든 사고에 대한 보상 여부에 있는 듯했다.

대표님의 이력을 보니 저희 어머니와 유사한 시기에 같은 대학을 나오셨더군요. 어머니는 예전 학생운동을 하셨다고 했는데. 대표님께서도 같은 활동을 하시고 국정원에서 조사까지 받으셨다고 하더군요. 혹시 어머니를 아십니까? 순간 김수필은 당황했다.

아. 워낙 오래전 일이라. 같이 활동을 한 것 같기는 한데 보면 알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워낙에 정신이 없던 시기여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많았죠. 최연경 기자의 활동은 매체로 저도 보기도 했죠. 아무래도 동시대에 같은 고민을 했으니까요.


오래전 일인데 잘 기억하시는군요.

누군가에게는 오래전이지만 그 당시를 살아온 당사자들에게는 생생한 기억입니다.

하지만 경찰 일을 하기도 하고 지금은 국책 기관 관련 일을 많이 하시네요. 정엽은 왜 경찰을 하다가 그만두고 공단업체 사장을 하느냐는 의도를 깔고 묻고 있었다.

하하, 수사관님 질문이 과도하게 개인인 저에게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저에 대한 관심인가요? 저는 제 자금의 일부를 투자하고 고용돼 일하고 있는 서해산업의 관리인일 일뿐입니다. 우연찮게 제약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이쪽으로 오게 된 것뿐이고요.

하지만 매출은 상당하죠. 몇 년 만에 이미 남쪽의 중견제약업체의 매출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까? 수의 계약 건이 많은데.

 그 일이라는 게 잘 풀리면 그렇기도 하죠. 사업이니까요. 수사관님은 사업을 안 해 보셔서 잘 모를 수도 있을 겁니다. 수필은 넉살 좋은 표정으로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그가 최연경의 아들이라는 말에 미세하게 목소리가 떨렸다. 수필은 정엽이 눈치 채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최연경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그녀가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가셨다고 했는데 이후에 실종상태입니다. 소식을 들은 적은 없습니까?    

저도 그 부분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때 저도 모든 노력을 다했죠. 가이드를 비롯해 행적을 찾느라 동분서주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업무에 소홀하다는 평가까지 들었죠. 하지만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개성임시정부에 탄원도 해보고 그 가이든지 뭔지 하는 사람도 노력을 많이 해줬는데. 결국은...

알겠습니다. 정엽은 짧은 대답을 대신했다.



 대화를 마친 후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대표의 책상 뒤편 기묘한 그림이 하나 붙어 있었다. 히에로니무스의 <쾌락의 정원>이었다. 바닥은 질이 좋지 않은 격자무늬 카펫이 깔려 있었고 철제로 만든 사물함과 파일홀더가 있는 책상이 보였다. 몇 권의 주간지와 경제동향보고서가 눈에 띄었다. 정엽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저 그림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림에 대해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후 공단 관리위원외를 들러 위원장과 만나 업체의 동향과 개성공단 2차 확장 및 행정상황에 대한 내용을 파악했다. 공단 초기에 엄격한 사상교육을 받고 통근버스를 이용해야 했지만 이제는 업체별로 사람을 모집해 관리한다고 했고 사상교육은 형식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다만 장마당이 예상외로 활성화되어 있으며 임금과 관련된 갈등이 남한의 공단 사업주와 몇 번 일어났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정보였다. 공단 근처에 생겨난 가건물로 만든 임시 근로자들의 여러 숙소들은 거대한 포로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둘은 시내로 돌아왔다. 정엽은 돌아오는 길에 출퇴근하는 노동자의 사상교육 그리고 치안과 보안관리에 대해 공단관리위원회 임원에게 들은 얘기를 시후의 말과 비교해 보았다.


기계처럼 컨베이어벨트에서 반복노동을 하고 있는 북한의 노동자가 정엽의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지겠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 체제가 변화 없이 유지되기를 바를 뿐이다. 그건 남쪽이나 여기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곳에서 다른 이와 다르게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게 될 것이기에. 오후 늦게 숙소에서 간단한 짐을 챙기고 버스를 타고 개성일대를 빠져나와 국경으로 향했다. 마치 며칠간 초현실주의적 상황과 마주한 듯 한 생각이 들었다. 개성일대를 지나 강가에 무렵에 이르자 오면서 보던 판자촌과 텐트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판자촌을 밝히고 있는 불빛이 점멸했다. 경험은 특별함을 낳고 기억에 의미를 부여한다. 처음 이곳에 올 때와 이곳을 나올 때 저들은 같은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정엽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곧 추워질 텐데 저들은 이곳에서 겨울을 날 수 있을까? 문득 정엽은 이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일상은 지속된다. 여지없이 불을 피워 밥을 해야 하고 나무를 때 추위를 피해야 한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고 몇 명은 공놀이를 하고 있는 듯했다. 저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있을까.


정엽은 어릴 적 어머니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북한은 독재이고 총통은 왜 독재가 아닌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엽은 총통의 통치를 아무런 의심 없이 위대하다고 믿고 있을 때였다. 물론 그 믿음은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갑작스레 누군가가 붙여 놓은 플래카드가 생각났다. ‘독재를 멈춰라’ 총통의 통치는 정교했다. 아니 총통을 중심으로 뭉친 그들은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독재가 아니다. 총통의 리더십을 따르고 있는 것뿐이다. 체제를 유지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해 플래카드가 몇 군대 육교에 나붙었을 때가 생각났다. 정엽은 사소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국수본 1과 까지 나서서 배후세력을 색출해야 한다는 등 소란이 있었다.


간단한 해프닝 같은 일에 권력이 전과 다르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사람들의 동요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페인트로 거칠게 써서 붙인 플래카드를 작성한 사람이 보안부서에 끌려갔다면 체제위험과 총통모독죄로 큰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정엽은 그 수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관심은 갖지 않았다. 체제 선동자 수사를 자신이 맡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저들이 총통 정권도 여기와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한수길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했다. 정엽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도 그럴 준비가 되어있는가. 복직에 신경 쓰는 자신이 어떻게 보면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또 다른 자아가 조직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텐트와 판자촌에 있는 저들은 이곳에 터를 잡고 있는 이유가 있을까. 누구든 가까이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다른 인생이 있을 것이다. 출입국관리소에서 서류와 몇몇 물품을 챙기고 파주쯤 들어서자 갑작스레 외국에서 귀국한 느낌이 들었다. 부장에게 보고할 내용을 정리하면서 usb 메모리에 담긴 내용을 떠올렸다. 이병수의 비위가 메모리의 내용이 맞다면 본격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김수필은 어떻게 서해산업의 대표가 됐을까. 그 부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암호화된 나머지 파일부터 열어야 한다. 누구로부터 그 메모리를 받은 것인지 아직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무엇을 위해서. 누구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부터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자유로를 달리며 김수필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머니가 얘기를 했던가? 오래전 어머니는 대학교 동문회와 관련된 통화를 하며 김수필 선배는 요새 어떻게 지내냐는 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엽은 자신의 기억 속을 헤집으며 자유로의 갈대밭을 곁눈질했다. 차는 고양시 일대를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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