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로봇회사 대표가 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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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승민 대표님 준비해 주세요.
진행자가 순서를 알렸다. 기술창업 지원을 위한 청년기업 벤처투자 설명회로 엔젤 투자자를 위한 하반기 마지막 창업자금 심사 자리다. 마지막 3차 PT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는다면 신용보증재단과 중기청의 보증서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 운영자금 추가 확보가 가능해 많은 벤처기업과 팀들이 프레젠테이션에 사활을 거는 중이다. 안승민도 3차 최종 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중기청 기술 심사역과 창업지원보증재단 기술심사평가위원이 자리에 앉았다. 사모펀드 쪽이나 투자자문회사 인원도 눈에 띄었다. 지난 심사에서 보았던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이들은 잔뜩 무게를 잡고 앉아 서류를 뒤적거렸다. 승민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이번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회사는 부도에 직면하게 된다. 투자금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승민의 웨어러블 로봇은 시장에서 평가가 나쁘지는 않았다. 다리와 팔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에게 그의 제품은 혁신적이었다. 기술적 어려움과 소재의 문제도 극복돼 가고 있었다. 시뮬레이션 실험도 막바지였다. 승민의 발표 후 심사역 강수혁이 물었다.
― 안승민 대표님 이번이 세 번째 도전이시네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하신 부분을 보면 아무래도 시장성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듭니다. 지금 안 대표님 말씀을 들어보면 가격이 너무 고가이기는 한데. 뭐, 일부 사람들에게는 큰 기대가 될 수 있기는 하죠. 그 접점을 찾는 게 중요한데.... 하지만 아무래도 대량생산을 하기에는 시장성이...... 그는 말끝을 흐렸다. 안승민은 자료를 훑어보는 그를 보고 말했다.
― 시장성은 충분합니다. 걸음이 불편한 노인을 위한 맞춤형 제품 준비를 진행 중입니다. 승민의 말을 들은 심사역은 고민하듯 볼펜을 만지작거렸다.
― 대표님이 고심해서 회사를 꾸려 가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여러 번 심사 대상에 오르기는 했지만 조금 더 제품에 대한 확신이 필요할 것 같군요.
대놓고 제품투자가 불가능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승민의 경험으로 볼 때 애매하게 돌려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이번 투자 건은 아무래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업을 하면서 받은 투자금, 대출금과 여기저기서 끌어 쓴 돈을 합치면 이제 여력이 별로 남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기회를 살려야 연구가 중단되지 않는다. 그는 인사를 하고 발표장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가자 세 팀 정도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승민을 처다 보고 있었다. 시선이 그와 마주쳤다.
‘잘 하고 왔냐’? ‘투자받을 가능성은 있느냐’는 눈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승민은 그들에게 ‘ 잘 안된 것 같다’라는 표정으로 답을 대신하며 밖으로 나왔다. 선릉로를 지나 강남역 방향으로 걸었다. 미팅은 끝났지만 몇 시간 이후에 한 번 더 기회를 노려 볼 수는 있다. 나머지 인원들의 설명회가 끝나고 투자자들과의 간담회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승민은 아직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대화를 나눈 뒤 입장을 바꾸거나 투자를 고민해 볼 수 있는 회사나 투자자도 있기 마련이다. 지난번에도 마지막에 어렵게 투자를 이끌어 내지 않았던가. 잠시 밖으로 나와 아메리카노를 시켜 금융 감독원 근처 옆 공터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 안승민 대표님? 오늘 벤처창업지원 프로그램 pt는 잘하셨나요?
청량한 높은 톤의 발성의 목소리였다. 아나운서나 방송캐스터 같은 느낌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듯 확신이 담겨 있는 듯 보였다. 승민은 조금 당황했다. 갑작스러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 하하. 당황할 만도 하겠네요. 대표님 발표하는 것 잘 지켜봤습니다. 안승민 대표님 뒤를 한번 돌아보시겠어요? 승민은 뒤로 돌았다. 160센티미터 정도 되는 키의 단발의 여성이 단단한 갑옷을 두른 듯한 더블 슈트를 입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어?
승민은 아직까지 그녀가 누군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많이 본 익숙한 얼굴형인데 인상은 많은 부분 바뀌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직 하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 나야. 민소진. 민소희로 개명을 했지. 오늘 중기청 관련담당자 만나려고 여기 왔어. 너 사업체 잘 나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승민은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했다.
― 와. 이게 누구야. 민소진 대학 때보고 얼마만이야? 너 합격했구나. 잘됐네. 아... 잘 나가긴 다들 그냥 회사 붙어 있으라고 말할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죽지 못해서 살고 있어. 이번에 여기 엔젤 투자나 지원 못 받으면 파산해서 지하실로 들어가야 할지도 몰라.
― 푸하하.. 왜 너희 회사 제품 좋던데...... 민소희는 웃으며 말했다.
― 정혜사건 이후 오랜만이지? 정혜라는 이름이 나오자 둘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 둘을 묶어준 것은 정혜이기도 했다.
― 그나저나 변호사라니 어떻게 된 거야? 얘기 좀 들어보자.
― 이따가 투자 미팅 한번 더 남은 것 아냐? 기회가 있겠지. 일단 잘 만나봐. 낼이나 모레쯤 시간을 좀 정해보자. 우리 오랜만에 얘기할 거리가 많을 것 같아. 민소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승민에게 명함을 주었다. 그녀는 시민단체 <정의연>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 소진이 너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구나.
―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나는 네가 로봇회사 대표가 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승민은 자리를 정리하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천천히 리셉션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준비된 발표가 마무리되고 리셉션 장은 여러 투자사 대표들과 인맥을 쌓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인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승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조금 늦게 왔는지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승민의 눈길을 끌었다. 180이 넘는 키에 고급슈트를 입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각진 턱에 펌을 해 올백으로 넘긴 훤칠한 외양의 사내였다. 재미교포 느낌이 들었다.
― 안승민 대표님? 피티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신 개념 웨어러블 로봇에 대한 견해 잘 들었고요. 장애가 있는 사람이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고 직립보행을 할 수 있다. 맞춤형 제품이라는 제품 콘셉트가 인상 깊었습니다. 휠체어 이용하는 장애인의 우선순위가 보통사람처럼 걷는 것이죠. 대표님 제품은 기존 웨어러블 로봇의 틈새를 노리는 새로운 전략처럼 느껴졌습니다.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명함을 건넸다. <레드넵 인베스트먼트>였다.
― 기술력이나 잠재력이 좋은데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회사를 찾고 있습니다. 안승민은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오늘 모임에서 유일하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투자회사였다. <레드넵 인베스트>라면 수천억의 펀딩을 하는 외국계 사모펀드로 유명했다.
― 콘셉트 단계의 제품인데 시제품이 나오게 되면 시장에서의 가능성을 좀 더 살펴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펀딩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미리 한번 예측할 수도 있습니다. 시제품 나오면 단점을 보완해 대기업제품과 차별화된 방향으로 가는 것도 좋지요. 맞춤형 틈새를 노리는 제품이 되면 시장성이 있을 듯 보입니다.
― 감사합니다. 얘기만 들어도 힘이 나는군요. 승민의 목소리는 살짝 상기돼 있었다. 회사 운영을 위한 추가 자금 확보가능성이 조금 더 커지고 있었다.
― 대표님과 언제 기회가 되면 제품과 회사의 비전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신창수 지부장은 그에게 알렉스 신이라고 적힌 명함을 주고 비서와 일정을 조율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승민의 표정은 한층 밝아졌다. 승민은 비를 피할 곳이 없는 광활한 절망의 평원에 내몰려 흠뻑 젖어 있다가 먹구름 사이로 갑작스레 한줄기 빛이 내리는 광경을 보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