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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페르소나 논 그라타 2부 -20-

너는 대체 왜 <엔젤 메카닉스>를 설립했어?

by proofs

*

― 그게 기회가 되었습니다. 정말 마지막 까지 몰렸거든요. 승민은 남은 차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편한 다리를 펴 몸을 일으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지만 로봇 착용이 숙달됐는지 자연스레 움직였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 듯 했다.

―아. 보셨습니까? 다리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장애가 익숙해 질만도 한데 아직 신경이 쓰이는 것은 여전하죠. 가끔 일에 몰두하면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쉽지는 않지요. 신창수 지부장에게 연락을 하고 투자를 받아낼 수 있었죠. 비상장주식을 발행해 지분을 양도하는 방식입니다.

― 민소희 변호사 아니 민소진과는 연락을 하셨습니까?

― 그 얘기먼저 해야겠군요. 승민은 다시 진열장으로 향했다.

― 어디보자. 그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스케쥴을 묻는 것 같았다.

― 다행이 저녁에는 별다른 일정은 없군요. 나가서 저녁을 좀 드시겠습니까? 나머지 얘기를 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어떻습니까? 그는 승민에게 잔을 권하며 물었다. 승민은 꼬냑을 유리컵에 절반정도 따라 조금씩 음미하며 목을 축였다. 현민도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고급스러운 코르크 향기가 입가에 맴 돌았다.


*

― 어서와.

승민은 민소진이 알려준 장소에 도착했다. 그의 시선에 <HEL>이라는 간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진은 바 테이블에 앉아서 언더락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수요일 저녁이었다. 퇴근시간은 끝나있었고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홍대 근처 문화의 숲 근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승민은 2층으로 올라가 유리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로 들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툴이 있고 여러 위스키와 술 들이 놓여 있었다. 소진은 그곳에 앉아 간단한 안주에 위스키를 마시려 하고 있었다. 낮은 조도의 따뜻한 느낌의 재즈바였다. 고급스러운 물품들이 주위에 배치되 있었고 우키요에 그림도 몇 점 그의 눈에 띄었다.


― 여기 분위기가 고급스럽고 좋은데. 너 좋은 데를 알고 있구나.

― 분위기 괜찮지? 소진은 웃으며 승민을 맞았다. 거의 9년에 이들은 다시 만난 것이다. 승민은 소진이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 네가 얘기 안했으면 몰랐을 거야.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 승민이 말을 꺼냈다.

― 하하. 그래? 어떤 모습을 상상했을지 모르겠지만 예상과 많이 다른가봐. 소희가 잔을 건냈다.

― 당당한 모습이 보이는데. 보기 좋은 거지. 승민은 바텐더에게 소진과 같은 것을 달라고 했다.

― 정혜의 죽음이 인생을 크게 바꿨어. 그날 우리가 만났던 그 술집에서도 그렇고. 최영은 패거리와 만난 날이지 아마.

― 아. 그때 우리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 그렇지. 그건 그렇고 참...... <레드넵 인베스트>는 어때? 괜찮아? 소진이 위스키를 홀짝이며 말했다.

― 네가 거길 어떻게 알고 있어? 승민은 놀란 표정이었다.

― 내가 중간에서 다리를 좀 놨어. 그 투자회사 한국지부 대표를 좀 알고 있거든.

― 그래? 이거 놀랄 정도인데.

― 신창수 지부장을 몇 번 만났어. 너희 회사 제품 얘기를 했는데. 투자처 관련해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더라고. 강하게 좀 푸쉬를 했고 의외로 긍정적 반응을 들었어.

― 와.. 내가 톡톡히 보상해야겠네......

― 회사상황은 어때? 지금 당장 시장성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더라고.

― 원래 이쪽업계가 모 아니면 도야. 과연 투자자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줄 수 있느냐 하는거지. 우리 아직 적자거든. 그만큼 지분을 주는 것이고.

― 그런데 네 얘기 좀 들어보자. 어떻게 변호사가 됐어? 너 원래 전공이 문학 쪽이었잖아? 아닌가? 그렇지? 정혜는...... 아니다. 승민은 말을 꺼내다 말았다. 둘은 위스키를 언더록으로 홀짝였다. 잠시 말이 없었다.

― 오래전에 말이야. 승민이 말을 꺼냈다. 난 그때 너도 알다시피..,,,,

― 하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뭘. 그때 내가 몸이 좋지 않았잖아. 난 학교만이라도 졸업하고 싶었어. 엄마가 사라지고 아빠가 나를 살리려 출소해서 노력을 했잖아. 너도 들은 게 있었겠지만.

― 너의 책임은 아니잖아. 승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지 그때 아버지가 날 살리려 거의 모든 노력을 다했고 완치된 줄 알았는데 결국 다시 병은 재발했지. 대학을 다닌 것도 기적이라고 했어. 정혜가 도와줬고. 대학 졸업은 하고 죽고 싶었는데. 정혜가 이태리 유학 가는 것도 보고 싶었고.... 대학은 그래도 고등학교보다 나았지. 최영은 같은 아이들은 없었거든. 소진의 그 말을 듣고 승민은 씁쓸하게 웃었다.


― 아 참. 오늘 보자고 한 것은 너한테 부탁을 할 게 하나 있어서야. 소희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 민소희 변호사님 부탁 이라면. 뭔들 못 들어주겠어.

― 아. 먼저 궁금한 것부터 물어볼게. 너는 대체 왜 <엔젤 메카닉스>를 설립했어? 신창수 지부장한테 얘기를 들어보니 대기업을 그만두고 일을 시작했다고 하던데. 지부장도 그 얘기를 하더라고

― 글쎄....... 사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경제적인 목적이 크지. 솔직하게 말하면 뭔가 만들어가는 재미도 있고. 거기에 더해서 내가 평범하게 걷는 것을 꿈꿨는지도 모르겠어. 생각을 해봤지. 내가 왜 회사를 그만두고 이런 모험을 했는지 말이야. 다들 눈치는 주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날 기피했지. 알고 있어. 나는 페르소나 논 그라타 지. 혹시 실수로 나의 장애를 언급하지 않을까. 상대방은 불쾌해 할 테고 실수하지 않을까? 뭐 그런 눈치들을 다들 보잖아. 사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너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지만 나도 한때는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지. 삶이란 것이 너무 불편하고 피곤하더라고. 군인인 아버지에 대한 어떤 반감 같은 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몰라.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뭔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건 물처럼 스며나오는 거지. 그런 분위기는. 아버지는 내가 자신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되기를 바랐고 그런데 그럴 수 없었으니. 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는 도움을 주지 못했어. 오래전에도 얘기했지만 너와 최영은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도 있었고 소문도 있었으니까. 나 혼자 나서는 것도 어려웠던 것 같고. 핑계일수도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부하는 것 기타연주 밖에 없었으니. 애들이 나를 괴롭히지 않은 것도 그게 큰 이유였겠지.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기피인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


― 승민아. 네가 기피인물이면 나는 사람이 아닌 사다코였잖아.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 그런데 말야. 너 정혜 좋아했지?

― 뜬금없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승민은 당황한 듯 말을 꺼냈다.

― 후후. 왠지 그런 느낌이 오래전부터 있었거든. 정혜는 이제 없지만. 그때 너 조금 더 용기를 내지 그랬어? 아니면 거절당했어?

― 그냥 나 혼자 정혜를 오랫동안 바라봤던 거지. 정혜가 처음 학교에 왔을 때부터니까. 내 기억으로는 그때 내가 기타 반에 있었거든 한동안 기타에 빠져서 혼자 이런저런 곡들을 연주하는 연습을 많이 했지. 오래된 도서관 있었잖아. 장서실. 그 곳 계단 옆 지하에 연습실이 있었어.

― 아. 기억나는 것 같아. 쓰레기 냄새와 낙서로 가득한 곳. 동아리 방이라고 했지만 거의 그런 수준이었지. 그녀의 말에 승민이 웃음을 지었다. 정확하게 맞아. 그곳 오래된 냄새나는 책들과 장서실에 너와 정혜가 주로 있었지. 맞지?

― 그렇지. 너도 가끔 올라와서 정혜를 훔쳐보기도 했고.

― 아 그건... 부인하지 않을게...... 승민은 웃음을 지었다. 대학 때 너희 둘의 관계를 안 다음부터는 다행이다 싶기도 했어. 난 끼어들 수가 없었어.

― 그런데 부탁할 것은 뭐야? 얘기해봐. 승민의 말에 민소진은 고민하는 듯 했다. 그녀는 위스키를 조금 마시고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그때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가계로 들어왔다. 바텐더와 소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민소희는 잠시 그녀와 눈인사를 하는 듯 하더니 승민에게 말을 꺼냈다.

― 신창수 지부장한테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얘기해줘.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조율해볼 테니까 나도 너와 같은 상황이라고 보면 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보려고. 소진은 그렇게 말하고 마치 보석을 보는 것 처럼 영롱한 호박 빛깔의 위스키를 눈으로 음미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깊은 내면의 고민을 유리잔에 토해내는 듯 보였다. 승민은 그런 민소희를 바라보다 말을 꺼냈다.

― 부탁할 것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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