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우는 당 대표 경선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받았다.
3부
14
황정우는 당 대표 경선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받았다. 분위기는 좋다. 수도권에서 시작해 11월 말쯤 형주에서 최대한 많은 표를 획득해 최고위원까지 노린다는 전략이었다. 분명히 형주는 자신에게 몰표를 줄 것이고 바람을 일으켜 여론을 반등시킬 수 있다. 오전에 자신을 지지하는 팬클럽 사이트를 확인했다. 지지 인원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민소희의 말대로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정기적으로 주제를 선정해 방송을 한 것이 큰 효과가 있었다. 실시간 대중에게 이슈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것이 지금은 필요하다. 대중정치 시대에서 지지자들과 소통하는 효과적 방법이다. 민소희가 그 정도일 줄이야. 황정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당대표가 되지 못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최고위원까지는 충분히 가능한 득표가 나올 것이다. 보수정당에서 소장파를 대변하는 늙다리 중장년과 대립되는 이미지를 가져가는 것은 앞으로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 효과적이다. 황호민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도 지긋지긋 했다. 아버지의 지인 국민의 당 중진 의원의 도움으로 말단 보좌관에서 출발했다. 여러 매체에 얼굴을 내밀었다. 국민의 당은 신선한 얼굴이 필요했다. 도움은 거기까지였다. 물론 그들이 기회를 만들어주기는 했지만 이후 오직 자신의 힘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황정우는 운동을 좋아해 균형 잡인 몸을 유지하고 있다. 외모는 이 바닥에서 중요하다. 학교에서 수업을 했던 경험도 있었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연설은 쉬웠다. 대상이 누구인가의 차이일 뿐이었다. 어려운 말들을 쉽게 풀어내 친화력을 높였다. 학교 수업이 도움이 됐다. 꼴통이나 머저리 같은 아이들에게는 쉬운 설명이 필요한 법이다.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도 쉬웠다. 연예인 급 외모와 새로운 mz세대 정치인을 무기로 종편과 라디오 쇼 오락 그리고 토론프로그램에 출현하며 보폭을 넓혔다. 하지만 그 때는 아직 정치인으로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가능성 있는 젊은 정치 지망생에 불과했다. 사건은 그날 발생했다. 황정우는 종합편성 채널의 가벼운 토론 프로그램의 패널로 출연하고 새벽에 귀가하는 중이었다. 다음날 일정을 생각하며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를 사 오피스텔로 향했다. 대로에서 이면도로 쪽으로 걸었다. 그때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멀리서 누군가 자신의 쪽으로 뛰어 오고 있었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급하게 뛰어 나왔는지 속옷 같은 반바지에 탱크탑을 걸치고 있었다.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있었고 마스카라는 눈물로 번졌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황정우를 잡고 방패 삼아 뒤로 숨었다. 이후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다. 그 사이 멀리에서 욕설과 함께 한 남자가 뛰어 오고 있었다. 대뜸 황정우에게 비키라는 말부터 꺼냈다. 넘어진 여자는 황정우의 옷을 잡고 일어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 야. 비켜 너 일루와. 황정우는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당황했다 .
― 왜 그러세요. 말로 하시지.
― 뭐, 이 새끼 너 안 비켜 저년 저거 잡아야 돼.
― 살려주세요. 안돼요. 여자는 긴박한 표정으로 황정우를 쳐다보았다. 곧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황정우는 남자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목과 팔에는 문신이 있었다. 땀에 젖은 얼굴로 황정우를 노려보았다.
― 좋은 말로 할 때 비켜라.
황정우가 전화를 꺼내 신고를 하려고 하자 갑작스레 그가 다가와 전화기를 빼앗으려 했다. 몸싸움이 시작되고 사내가 황정우를 제압하려 했지만 대치가 이어졌다.
―햐. 이 새끼 봐라.
사내는 두리번 거리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황정우는 뒤돌아 그녀를 보며 빨리 경찰에 신고하라고 말하는 순간 복부에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마치 손을 난로에 데인 듯 따가웠다. 불덩어리가 닿는 듯 했다. 술취한 사내가 칼로 황정우의 복부를 찌른 것이다.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5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몇 명이 술에 취한 몇 명이 지나가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황정우와 여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는 욕설을 하며 방향을 돌려 뛰어갔다. 사람들이 둘을 부축하고 황정우는 즉시 병원으로 실려 갔다. 상처는 크지 않았다. 간단한 응급치료를 받고 입원실로 향했다. 사건 영상이 유투브에 올라와 이슈가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건 전개였다. 황정우는 여성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여성 친화적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정치인의 이미지를 얻었다. 그에게 나쁠 것은 없다.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국민의 당 청년 위원회에서 그의 입지는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주축이 된 <가디언 콜>이라는 정치 후원회도 생겨났다. 피해자와 연락처를 주고받다 그녀의 변호사가 민소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웃음이 나왔다. 상상조차 못했다. 죽어가던 민소진이라니. 인간의 동물성을 실험하기 위한 대상에서 환골탈태해 전략가가 된 것이다. 이 무슨 천지 개벽할 일이란 말인가.
그 애가 변호사가 돼서 나타난 것은 호랑이가 원래 초식동물이었다는 말을 듣는 것처럼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람구실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한 아이었고 교실 생태계의 관찰과 실험 대상이었다. 약자는 도태되는 것이다. 황정우는 그 실험을 대규모로 사회적으로 확장할 생각을 해보았다.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것 그가 생각한 정치의 목표였다. 교실로 불리는 세계에 자신은 개입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만의 세계의 진화를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 실험체가 변호사가 돼 자신의 정치적 전략을 챙기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닌가. 신선했다. 민소희의 정무 감각은 나쁘지 않다. 생각해 보니 오래전 민소진은 혼자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보고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토론프로그램을 할 때도 자료나 격언 고전을 통한 논리개발과 적재적소에 유식한척 쓰는 학자의 말들을 찾을 때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었다. 황정우는 민소희에게 보좌관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절 했다. 자신이 움직일수 있는 부분이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여러 방법으로 자유롭게 정치적인 이슈를 만들고 도움을 주는 것이 낫다고 했다. 가끔 그녀는 야당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조언을 해 줄 때도 있었다.
민소희는 황정우의 당 대표 당선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었다. 최고위원까지는 가능해 보인다는 견해를 넌지시 밝혔다. 지금 당대표가 되면 너무나 많은 적이 생기고 약점을 노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호민에게는 좋지 않겠지만 양숙희가 재선을 하는 것이 차후 형주의 지역구를 노리는 자신에게 더 낫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는 듯 보였다. 노구를 이끌고 재선을 해봐야 이식받은 신장으로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이제는 한계다. 양숙희가 여당 프리미엄이 있지만 여성과 복지정책에만 치중하고 지역구를 소홀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 지역에서 평이 좋지는 않다. 양숙희가 당선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 당대표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인지도는 높일 수 있고 최고위원이 될 수는 있다. 너무 성급하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라는 아버지의 말도 맞다. 한번쯤 물러나는 것도 좋다. 무리하게 네거티브를 해서 당 대표를 노릴 필요는 없다. 동의하는 부분이다. 민소희는 대중의 취향과 정서에 맞는 것들을 잘 골라낸다. 보수를 표방하는 이 정당에서 소수자와 장애인 여성 그리고 청년을 대변하는 역할을 선점하는 것은 효과적이다. 어쨌든 선생으로 2년간 근무한 게 이런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골칫거리 최영은이 어떻게 그렇게 사라질 수 있는지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최영은은 자신에게 찾아와 결혼을 요구했다. 반석동 투자를 위한 자금과 지분을 더 요구해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다. 돌아가는 모양새가 아버지 황호민이 송민지와 엮였던 방법과 비슷했다.
최영은과 전화를 하며 큰 소리로 싸운 것을 민소희가 들었을 수도 있다. 황정우는 그게 좀 걸렸다. 민소희가 사실을 아는 것이 굳이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골칫거리가 사라진 셈이다. 몇 건의 살인사건이 형주에서 벌어졌다고 하는데 굳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아버지 황호민은 여론조사에서 밀리고 있다. 황호민 의원은 이제 은퇴할 때가 됐다. 당선이 돼도 문제다. 나이도 많고 제대로 된 판단도 내릴 수 없다. 반석동으로의 학교이전도 마쳐야 한다.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 최고 의원이 되고 다음에 아버지 지역구를 차지 하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다. 민소희는 앞으로도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을 옥죄고 있었던 제어장치가 같은 것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모든 것은 원하는 대로 풀리고 있었다.
황정우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황호민은 처음으로 지역구 국회의원이 됐다. 황호민은 서울에 잡힌 일정으로 집을 자주 비웠다. 지역구를 챙겨야 하기에 일주일에 한번은 형주지역의 행사 등에 얼굴을 비췄고 집에도 자주 들렀지만 이후에는 한 달에 한 번도 제대로 집에 가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황호민은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황정우에게도 자연스레 소홀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집에 들를 때가 있었지만 다툼만이 반복됐다. 황정우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 무렵 교통사고로 황정우의 모친이 사망했다. 형주시 평탄읍의 한 외각도로였고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를 위해 멈춰서 있다가 그녀의 차는 신호를 위반한 덤프 트럭과 충돌했다. 승용차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서졌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운전자는 5톤 트럭을 몰던 50대 남자였다. 그는 과실치사로 입건됐다. 브레이크가 파열돼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한 것으로 사건은 종결됐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의정활동으로 바쁜 황호민이 가끔 집에 들를 때 못 보던 30대 여자 보좌관이 황호민의 옆에 있었다. 일 년 후 송민지는 새 어머니 역할을 자처했다. 황정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tv프로그램에서 더 자주 보는 듯 했다. 가끔 집에 들를 때는 여지없이 송민지 보좌관과 함께 였다. 황정우는 그녀가 집에 온 순간 한눈에 그녀에게 빠졌다. 황정우는 아버지와 송민지의 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무렵 황정우는 아스퍼거 증후군이 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깊은 대화와 관계를 지속하지 않는 한 일반인과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황정우는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학습으로 극복은 가능했다. 상대방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면 되는지. 황정우는 여러 번 실험을 한 이후 적절한 대처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됐다. 처음 대화와 화제의 방향을 잡아내는 것이 어려웠지만 이제는 상대의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대충 맞출 수 있었다. 맥락과 다른 대화를 하면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황정우는 그 모습에서 재미를 느꼈다. 황정우가 사람을 다스리고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강제하는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게 그 즈음 부터였다.
― 어머, 의원님 아들이에요? 묘하게 닮기는 했네요. 잘생겼는데요. 고등학교 1학년인데 몸도 좋고 키도 크네요. 안녕. 난 송민지 보좌관이야. 아빠의 일을 돕고 있어. 그녀는 황정우를 보며 하이톤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냈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트위드 자켓에 블랙스커트를 입었다. 그 여자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황정우는 생각했다. 송민지 보좌관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정우야. 인사드려.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 정우는 기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황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쪼그리고 앉아 황정우에게 시선을 맞췄다.
― 어머 얼굴 빨개지는 거 봐. 귀엽네. 반가워,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잠시 후 황정우가 집으로 들어가자 황의원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말을 잘 못할 수도 있어. 좀 아프거든. 황의원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어머, 어디가 아픈데요. 멀쩡한데요? 그녀는 걱정스럽다는 투의 말이었다.
― 뭐, 그냥 그런 게 있어. 조금 사회성이 부족한 놈이야. 다른 건 괜찮지만.
황정우는 지역에 행사가 있거나 아버지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며칠 전부터 송민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었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형주시 지역 도당 협의회 모임으로 내일 아버지가 집에 들른다고 했다. 송민지를 만나서 이야기를 할 생각에 황정우는 기대하고 있었다. 오전부터 이상하게 머리가 아팠다. 조퇴를 하고 집에 일찍 온 뒤에 거실 소파에 가방을 던지고 잠시 앉아 있었다. 그날은 정밀검사를 위해 형주 대학병원에 하루 입원하기로 한 날이었다. 수면장애에 대한 치료를 위해 뇌파검사가 예정돼 있었다. 10시 무렵 잠이 들었다가 열두시 쯤 눈이 떠졌다. 환경이 바뀌어서인지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머리에 부착한 뇌파 측정 장치를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시간 정도 뒤척거렸다.
집에 가서 잠을 자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정류장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비번을 누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2층의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려 하는데 기묘한 소리가 안방에서 들렸다. 황정우는 도둑이 든 줄 알았다. 아니다 여자의 교성이었다. 그의 촉감과 감각은 최고조로 민감해졌다. 주위를 둘러싼 공간이 휘어지고 회색빛으로 변해 버린 느낌이었다. 발소리를 줄여 조심스레 움직여 안방을 살펴보았다. 낮은 조도의 스탠드가 켜져 있었고 벌거벗은 두 사람이 껴않고 몸을 섞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황정우는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 붙었다. 마치 최고속도로 달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듯 시야는 소실점을 따라 좁아졌다. 송민지의 신음소리가 높아졌다. 순간 황정우는 송민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을 보고 살짝 웃음을 짓는 표정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황정우는 며칠간 학교에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고 모두 그를 슬슬 기피했다. 증상은 더 심각해 졌다. 학교에서 황호민에게 연락을 했다. 황정우는 질병을 이유로 학교를 쉬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황정우는 환청에 시달린다고 했다. 누군가 머리를 짓 누르는 것 같다고 했다. 송민지는 형주 황호민의 집에 머무는 날이 늘어났다. 황정우는 아예 휴학을 했다. 지역의 수해가 발생해 황호민은 지역구에 내려오는 일정이 잦았고 보좌관인 송민지의 동행도 늘었다. 수해로 인해 일주일에 3일정도 집에 머무를 때도 있었다. 호우경보가 발령되고 형주 지역의 구도심을 비롯한 반석동 일대 침수가 일어나 지역일대는 시끄러웠다. 송민지는 형주에 발이 묶인지 3일 째였다. 그녀는 전화로 황정우에게 소리를 지르며 짜증을 부렸다. 자신은 내일이라도 당장 버스를 타고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난다는 말로 화를 누르고 있었다. 송민지는 처음에는 잘 적응하는 듯 보였지만 갈수록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처음에는 황정우 에게 관심을 보이는 척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둘의 관계는 껄끄러웠다. 그녀는 황정우가 자신을 이상하게 기피한다고 생각했다. 황정우는 하루 종일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지난번에 정우와 한번 충돌한 뒤 그녀는 그를 좀 조심스럽게 대했다. 먹을 것을 챙겨 노크를 하고 그의 방에 들어갔지만 황정우는 벽을 보고 누워있었다. 이들 간에 오랫동안 대화가 없었다.
― 정우야. 잠깐 일어나서 이것 좀 먹어볼래?
황정우는 그녀의 손길이 닿자 순간 이불을 들추고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버렸다. 송민지는 짜증이 났다. 송민지는 황호민과 만나기 시작할 때 그와의 결혼을 염두해 뒀다. 이 집구석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집안의 재산은 모든 단점을 커버할 정도로 탐이 났다. 황호민의 전처가 숨진지 꽤 됐기 때문에 슬슬 재혼얘기를 꺼내도 될 성 싶었다. 하지만 황호민은 아직 시간이 더 있어야 한다며 반대하는 중이었다.
― 식은 언제 올릴 거예요? 이제는 공식적인 자리에도 같이 나가야 하는 것 아니에요? 의원님과 제가 만난 지 벌써 4년째라고요. 집구석에 처박아 둬야겠어요? 송민지는 목소리를 높였다. 송민지는 매번 반복되는 그의 같은 말에 짜증이 났다.
― 아직은 좀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목소릴 좀 낮 춰. 누가 들으니까.
― 들으라고 해요. 의원님이 저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송민지가 자리에 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 어허. 그만 진정하고. 잠깐 얘기를 들어. 아직은 정우도 아픈 상태고.
― 그놈의 정우 핑계는 그만 좀 대요. 정우가 어린애에요? 고등학생이라고요. 알 것 다 알 나이인데 뭐가 그리 겁나서 얘기를 못해요. 그 어린놈의 눈치를 뭘 그리 볼게 있다고. 둘의 목소리를 더 높아졌다. 황정우는 송민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둘의 대화에 황정우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 다음 주에 저놈을 데리고 해야 할 것이 있어. 어느 정도 진정이 좀 돼야 하니까. 그 말을 들은 송민지가 웃음을 지었다.
― 의원님 제정신이세요. 지금 세상에 굿이라니요. 정우의 상태가 이상해 진 게 귀신이라도 씌웠다는 거예요? 송민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당신은 모르지만 우리집안에는 그런 게 있어. 나 역시 어릴 적 비슷한 증상에 시달린 적이 있었고. 전에도 얘기했지만 동생으로 인해 내가 그 상태에서 벗어 날 수 있었던 거야. 저놈도 제대로 된 무당을 만나 저걸 없애면 괜찮아 질 거야. 황호민은 깊은 숨을 내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