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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도사 Aug 26. 2022

김승희,〈심경〉(2014) 리뷰

〈심경〉, 마음은 부지런하게 털고 매끈하게 닦아내지 않아도 괜찮은 거울

〈심경〉, 마음은 부지런하게 털고 매끈하게 닦아내지 않아도 괜찮은 거울


! 작품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심경〉의 화면은 울퉁불퉁하고 깨끗하지 않다. 불교에서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니, “늘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달라붙지 않게”¹ 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김승희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은 ‘마음 속, 혹은 마음의 거울’을 제목으로 삼으며 불교적 도상들이 잔뜩 등장하면서도 장면 장면에 상자를 접고 종이가 쭈굴쭈굴 해진 흔적, 거칠게 오려낸 단면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사람과 오브제를 그려내는 선의 굵기는 일정하지 않고 삐쭉 튀어나오기도 한다. 검은 티끌이나 회색 먼지가 지워지지 않은 프레임도 있다. 〈심경〉의 마음은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작품이 시작되고 바람 사이로 짹짹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그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다 보면 산 속에 갇힌 작고 네모난 방 안에서 한 여성이 풍경을 울린다. 그 종소리는 노이즈 섞인 외부의 소리를 파고든다. 선명하게 울려 퍼지면서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여성은 굴곡진 부품들을 이리저리 조립해 미로 같은 관을 만들어 마음을 들여다본다. 자연스럽게 뻗어나가거나 유연하게 구부러진 형태가 아니라 이곳저곳 모서리가 생긴 관이기에 마음에서 뻗어 나온 이정표 역시 이리저리 부딪히며 시야에 닿는다. 여성의 무심한 시선을 환영하듯 경쾌한 연주가 시작된다. 여성이 관을 통해 살펴본 마음 너머에 (과거 혹은 마음 속 자신으로 예상되는) 한 여성이 가슴과 두 겹으로 접힌 뱃살, 엉덩이를 즐겁게 흔들고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유두와 음모를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맨발로 춤추는 여성은 사랑스럽다.


그러나 몸을 힘껏 조이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높은 구두에 어울리는 얇고 긴 다리를 자랑하며 걸어가는 또 다른 여성이 지나갈 때, 자기만의 방은 사라지고 험난한 줄 달리기가 시작된다. 똑같은 검고 짧은 드레스와 높은 구두에 몸을 우겨넣고 가까스로 숨을 참는 여성은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풍선처럼 느껴진다. 편안하고 즐거웠던 맨발의 스텝이 밧줄이라는 기준선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순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하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경〉에서 여성의 하강은 아득한 좌절인 동시에 마음이라는 거울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이기도 하다. 줄 달리기는 이어지지만 여성은 이제 날아오르고 변신하고 매달리고 동료를 찾는다. 멋진 신사를 흉내 내지만 쉽게 무시당하고 분노하며 타오른다. 다시 여성은 옷이라는 속박을 내던지고 달려 나간다. 그러다 줄 위를 유영하는 여성을 보고 따라 하기도 한다. 이윽고 비행사를 만나 선 너머 어떤 곳으로 함께 날아가며 자유를 느끼다가 결국 떨어지는 곳은 부처의 손바닥 안이다.


부처와 마주하며 죽음으로 탈피되고 다시 생으로 돌아온 순간 시야는 아득해진다. 목탁을 연상시키는 타악기 소리와 함께 현란한 망원경이 펼쳐진다. 불교와 기독교의 신과 성인, 현실의 인간들은 이내 상반되는 존재들과 짝지어졌다가 감정과 육체를 오간 뒤 삶과 죽음이라는 거울 등 다양한 상징을 거치며 꽃으로 귀결된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이미지 속 잔상으로 지나간 여성의 표정이 다시 평화로워졌다는 것이 위로로 남는다. 


결국 마음의 모험과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여성이 어떤 얼굴일지 알 수 없다. 그녀의 끝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마음을 단단히 여미고 자기만의 방을 나오는 걸까? 아니면 자기만의 방 안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더 나빠져서 홀로 죽어가는 걸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미래를 알 수 없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불교와 유교 같은 동양철학에서 마음은 수양해서 더 좋은 결말로 나아가야 할 대상이다.


〈심경〉에서 마음은 항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다. 불을 뿜고 낙하하고 알 수 없는 존재들과 엉켜서 엉망이 되곤 한다. 그럼에도 즐겁게 몸을 흔들고 줄 위를 날아다니는 여성은 우리의 뇌리에 든든하게 남아있다. 이 각인은 ‘매끄러워지지 못하면 어때? 언젠가 다시 즐겁게 춤 출 수 있는 마음이 들지도 몰라!’라는 응원의 메아리일지도 모른다.




¹ 혜능의 게송으로 임부연의 해석을 인용하였다. 임부연, 「거울의 종교적 상징체계 -유학자의 마음공부를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 제25호(2013), 70.



                  

김승희 감독님의 초기 작품 두 편은 개인적으로 마음돌봄 2부작이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거나 연대할 존재가 필요할 때는 〈심심〉을 혼자서 이겨내고 싶을 때는 〈심경〉을 봅니다. 작년에는 마음에 사무치는 일이 많아 〈심경〉을 보며 많이 울곤 했는데 올해는 웃으며 지인들에게 최애 작품으로 영업할 수 있어서 신나고 뿌듯하지요. 퍼플레이에 쓴 돈이 얼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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