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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도사 Sep 02. 2022

새롭게 태어나려는 자는 녹아내려야 한다.

마리아 에스텔라 파이소,〈창 밖에 개구리가 비처럼 내리고 있다〉(2021

* 제24회서울국제영화제 온라인 상영관 관람하고 쓴 리뷰입니다.

* 작품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 이미지 출처: 작품 스틸컷-온피프엔, 공식 포스터 이미지-베를린 비엔날레 아카이브 페이지 




〈창 밖에 개구리가 비처럼 내리고 있다〉, 새롭게 태어나려는 자는 녹아내려야 한다.

  Maria Estela Paiso, Ampangabagat Nin Talakba Ha Likol (2021), 14min.


〈창 밖에 개구리가 비처럼 내리고 있다 Ampangabagat Nin Talakba Ha Likol〉는 강압적인 고립에 갇혀 불안정한 자아를 탐구하는 짦은 기담이다. 대종말의 시대, 주인공 마야는 잠발레스의 고향집으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흔적들을 마주한다. 영화 제목과 시놉시스 모두 매우 직설적이면서 은유적이다. 그러나 14분 동안의 러닝 타임 내내 몰아치는 시각적 환상들은 기이하고 설명하기 어렵다. 자신의 감독 데뷔작에서 마리아 에스텔라 파이소(Maria Estela Paiso)는 앞선 세대의 독특하고 충격적인 장면과 성경의 상징들을 다채로운 애니메이션 기법들로 오마주하며 종말이 가까워진 세계 안 현실과 환각, 기억과 꿈의 경계를 흔들어놓는다. 


팬데믹 한가운데 제작했을 게 분명한 이 영화는 문자 그대로 ‘개구리가 비처럼’ 쏟아지며 시작된다. 마야는 집 안에 갇혀 그 풍경을 바라본다. 그녀는 쉬는 날 집에서 가만히 있는 게 좋다고 하지만 “고독이 개인의 선택이 의무가 될 때는 다르다. 집이 더 이상 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는 다르다.” 종이접기 개구리, 동전과 지폐, 탑승권, 열쇠들이 화면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안 마야는 비닐로 납작하게 찌그러져 고정된다. 이동가능한 물건과 증명들, 친구들과 가족들과 함께 했던 사진들이 그녀의 기억을 스쳐가지만 “일상의 단조로움. 물리적 접촉의 부재”가 더욱 두드러질 뿐이다. 꿈 속인지 환각인지 기묘한 일들이 계속된다. 마야는 물 속에 가라앉는다. 벌레가 얼굴 곳곳을 이동하고 작은 바다가 펼쳐지기도 한다. 그 사이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계속해 오버랩된다. 기억 탐구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마야는 점점 녹아내린다. 



이 짧은 영화에서 나타나는 기이한 상징들은 재앙과 관련된 다양한 선례들이 떠오르기에 강압적 고립이 주는 공포를 배가시킨다. 개구리 비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매그놀리아〉의 재현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개구리 비에 담은 의미는 여전히 분분한데 파이소는 긍정적인 쪽은 아닌 듯하다. 잠발레스에서 내리는 개구리 비는 3D 애니메이션화 된 마야의 얼굴을 타고 다니는 메뚜기 같은 벌레와 공존하면서 성경 속 대재앙의 부활을 연상시킨다. 더불어 마야를 옥죄는 머리카락이나 화질이 깨지며 지지직 거리는 어린 시절의 영상들은 아시아 공포영화들에서 흔히 등장하는, 불길하게 잠식하는 어떤 것들이 떠오른다. 마야의 녹아내리는 얼굴과 신체는 〈바디 멜트〉나 〈플라이〉같은 괴생명체와 결부된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알 수 없는 불안감 사이로 녹아내린 마야의 결말을 기다리게 된다. 


정신없이 스며드는 기괴한 체험들이 오고간 끝에 고요함이 남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창 밖 너머 개구리 비가 내리는 풍경이 보이는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마야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정하게 정리해놓은 티셔츠에서 개구리만이 빼꼼 고개를 든다. “뭔가 다른 형상으로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속삭이는 나레이션처럼 마야는 개구리로 탈피하게 된 걸까? 개구리는 옷 밖으로 나왔지만 집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여전히 비처럼 내리는 개구리들을 지켜본다. 이 새로운 형상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창 밖에 개구리가 비처럼 내리고 있다〉는 희망과 연대의 메세지는 커녕 고통스럽게 자아를 탐구하다가 녹아내릴 뿐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세계적인 폐쇄조치는 철회되거나 완화되는 추세지만 고립과 격리가 주었던 불안감은 현재진행형이다.  마야는 자신의 고립을 “개인적인 비상사태”라고 이야기하지만, 마야의 이야기는 팬데믹이 완전히 종식되지 않은 시대의 우리 모두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비상사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은 아시아 관람객들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파고들지도 모르겠다. 내게 개구리 비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도입부는 마야가 입고있는 빨간 티셔츠의 뒷면이었다. 필리핀 시인 프레드 부나오의 반마르코스 슬로건, “대중이 봉기하지 않으면 식탁 위의 빵은 없다.”라는 문구가 초현실적 자아 탐구과정 사이로 조각조각 끼어있는 혁명의 파편들을 예민하게 포착하게 한다. 모든 필리핀 지역언어인 삼발어로 구성되었고 잠발레스 지역의 어민 사건을 다룬 기사가 꼬깃꼬깃 등장하며 깨진 유리파편처럼 날카롭게 반짝인다. 과거로부터 현실로 이어지는 전통과 정신, 정치적 사건들이 우리의 불안한 자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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