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고향에서 “고향을 떠난 듯한 낯선 삶”을 일구는 사람들
고려인들의 이주는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끝나지 않은 식민의 역사다. 1870년대 조선 북부의 흉년을 계기로 먹고 살기 위해 러시아로 할양되었던 만주 일부와 연해주로 옮겨간 것이 긴 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고려인들은 1937년 스탈린의 결정에 따라 중앙아시아 일대로 강제이주 당한 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기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 독립하면서 고려인들은 온전한 외국인으로 살아갔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 고려인 가운데 많은 이들이 한국으로 옮겨오고 있다. 고려인들은 자아를 찾기 위해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러시아로, 러시아에서 혹은 또다른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한국으로 여행을 감수한 것은 아니다. 대개 이들은 경제적인 이유에서건 고향에서보다 선진적인 의료 혹은 문화 혜택을 위해서건 가족을 위해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이주와 정착을 거쳐 공동체를 형성해왔다.
현재 한국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선조들의 고향에 옮겨온 것으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언어와 문화 모두가 낯설고 법으로는 국민과 이주민의 경계에 놓인다. 그들에게 한국은 삶의 터전을 다시 개척해야하는 땅이다. 식민지 해방에 헌신했던 혁명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프란츠 파농은 예속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게 토착적인 문화전통과 억압된 역사를 되찾아주기 위한 언어를 구현했다. 호미 바바는 “고향을 떠난 낯설음(unhomley)”을 중점에 두고 프란츠 파농의 이러한 시도를 해석한다. ‘언홈리’라는 단어는 ‘낯선 두려움의 상태’를 의미하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인데, 바바는 이 개념을 “고향과 세계를 재배치해서, 초영토적이고 문화혼혈적인 것을 창시하는 조건을 만드는 이질적인 감각”으로 사용한다. “고향을 떠난 듯한 낯설음의 경험은 고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며, 사회적 삶을 사적/공적 영역으로 분리하는 친숙한 개념에 안이하게 수능하는 것도 아니다. 고향을 떠난 낯선 순간은 우리 자신의 그림자로서 은밀히 다가온다.”
엠 발렌틴은 우즈베키스탄과 한국 모두가 고향이라고 되뇌인다. 이 엘레나는 소련 시절부터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들을 누볐기에 한국만을 이질적으로 느낀다. 강계샤에게 한국은 가족의 터전이고 손주들의 고향이다. 이나쟈는 일하기 위해 계속 여러 나라를 오가느라 태어난 도시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한국의 지원정책과 풍부함을 좋아하지만 그녀에게 “우리나라”는 우즈베키스탄이다. 최 비탈리는 한국어를 모르지만 생김새로 차별받지 않기에 한국을 고향으로 여긴다.
《2023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고려인들은 저마다 한국과 고향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전시장에서 이들은 사각 틀 안 영상 속에서 이야기하기에 다른 시공간에 머무는 듯 하지만 픽션 속 캐릭터들은 아니다. 그렇기에 고향을 떠난 듯한 낯설음은 이들을 극적인 결말로 몰아가지 않겠지만, 오히려 끝나지 않고 지속될 현실감각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한국에서 ‘고향을 떠난듯한 낯선 감각’을 느끼고 있음을 인식했을 때, 함께 살아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023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작가 김양우는 본인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지라도 고려인들의 참여와 지역 공동체의 도움으로 완성되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문화더함공간 서로는 고려인들과의 만남을 도왔고 그렇게 만난 고려인들이 또다른 고려인들을 소개했다. 사자와어린양도서관은 우리랑합창단과 함께 프로그램을 열 수 있도록 함께 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시를 홍보했다. 발안시장에서 만두가게를 운영하는 박 플로리다는 짐치 워크숍을 준비하고 한국 내 고려인들의 상황을 설명해줬다. 작가가 고려인들의 흔적을 기록하는 여행을 떠났을 때 우슈토베의 임마누엘 교회가 도움을 주었다. 자신의 이동과 삶을 이야기한 고려인들 모두가 전시에 애정을 가지고 연계 프로그램을 만들 때에도 기꺼이 참여했다.
《2023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 전시를 앞두고 발안시장 곳곳에 포스터를 붙일 때 시장사람들은 아는 이름들을 반겼다. “플로리다 만두의 박 플로리다! 오아시스의 강 계사!” 박물관이나 미술관, 심지어 대도시에서 상당 기간 자리 잡아 잘 알려진 미술 공간도 아닌 시장 길목에 놓인 빈 공간에서의 전시. 전시장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고려인들의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와 과거에 묻힌 선조들의 땅, 앞으로 나아가게 될 어린이들이 만들어낼 노래와 소품들이 뒤섞여있다. 이러한 뒤섞임은 시간과 감정이 담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현실적 고난과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은 소통의 어려움, 그럼에도 함께 나아갈 것이라는 이상적인 다짐과 희망.
한국의 고려인들은 고향을 떠나 멀고도 가까운 나라에서 터전을 일구고 있다. 자식과 손자들의 고향은 선조의 고향으로 거듭나기에, 어떤 이들에게는 한국도 고향이 되기도 한다. 외모가 다르지 않고 전통과 역사의 일부를 공유하더라도 낯선 언어를 배울 겨를도 없이 살아남아야 하기에고려인들에게 “고향을 떠난 듯한 낯선 감각”은 매순간 일상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한번의 전시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담을 수 없고 어떤 해결책을 보여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23 이주 이야기 프로젝트》가 경기도 화성에서 살아가는 다섯 고려인의 이야기를 전하고 지역 토착 공동체와 고려인들이 함께 하는 시간들을 드러내며, 이주하는 이들이 느낄 “고향을 떠난 듯한 낯선 감각을 개별적인 것을 넘어서 공동의 것으로 여길 수 있을 순간이 되길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