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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도사 Dec 29. 2022

부러지지 않고 나아가는 방향

《불순한 파괴, 다정한 결합》전시 서문과 감독 소개


                                                             design. Apepper

《불순한 파괴, 다정한 결합》 전시 서문


불순하게 파괴하고 다정하게 결합하기, 부러지지 않고 나아가는 방향


몸짓은 현존재가 밖으로 나타나는 신체의 움직임이다. 우리는 그 움직임에서 몸짓을 하는 사람이 세계 속에 어떻게 있는지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몸짓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움직임이 다른 모든 움직임들처럼 제한되어 있음을 알더라도, 그 움직임을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빌렘 플루서, 『몸짓들』, 안규철 옮김(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8), 81.




팬데믹의 종언을 꿈꾸거나 재유행을 염려하는 목소리들로 혼란스러웠던 한 해가 지나갔다. ‘나갈까 말까? 움직일까 말까?’ 그간 우리는 자신의 혹은 서로의 움직임을 더욱 주의 깊게 살펴왔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고 몸짓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고민은 진부해진 두려움과 떨치지 못한 위기감이 상충하던 2022년의 날들에 더욱 치열했을지도 모른다. 이때 몸짓들을 꾸준히 해석하며 세계를 읽어내려던 빌렘 플루서의 시도가 우리 시대에 성큼 다가온다. 플루서의 말처럼 몸짓이 상징이 부여된 움직임이기에 현존재를 표출하고 그 존재가 속한 세계를 드러낸다면, 어떻게 몸짓을 읽어야 이토록 어지러운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걸어 잠궜던 문을 다시 열 때 우리의 몸은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전시 《불순한 파괴, 다정한 결합》은 몸짓과 세계를 연결하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하나의 열쇠로 애니메이션을 제안한다. 애니메이션은 몸짓을 집착적으로 분석하고 해체하여 다시 조립하고 결합하는 매체이다. 그 가운데서도 이번 전시는 단편 애니메이션에 주목한다. 짧은 상영 시간 안에 캐릭터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애니메이션들은 나노 단위로 움직임을 쪼개고 이어 붙이며 움직임 하나하나에 치밀하게 의미를 부여하며 몸짓으로 거듭나게 한다.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대개 독립의 영역에서 작업하기에, 글을 쓰고 그리거나 만들고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고 촬영을 하는 총체적인 몸짓으로 캐릭터의 움직임을 실현하고 통제하며 세계를 부여한다. 


《불순한 파괴, 다정한 결합》에서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 3인, 김보영, 김승희, 우진의 초기작을 소개하며 이들이 만들고 포착했던 움직임들을 돌아본다. 10년 가량 감독들은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내면과 관계, 사회를 탐구해왔다. 이 여성들의 작업에서 캐릭터들은 저마다 뒤틀리게 웃거나 꾸깃꾸깃 조각나거나 기묘하게 분화된다. 그 움직임들은 어쩌면 감독들이 장애물로 가득한 세계에 맞서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불손하게도 그들의 작업에는 신체와 마음, 관계와 사회. 세계가 규정한 규범들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몸짓들이 있다. 그 결과 폐허가 남을 것이다. 다만 김보영과 김승희, 우진의 작업은 “자유에 대한 좌절된 추구”¹로만 끝나지 않는다. 황폐한 벌판에 서서 더 넓어진 시야를 얻어 이들은 서로를 발견한다. 이 전시는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읽기 위해 파괴의 몸짓을 그려낸 감독들의 현재가 미래로 이어질 어떤 다정한 결합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¹ 빌렘 플루서, 『몸짓들』, 안규철 옮김(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8), 88.



참여 감독


김보영


김보영,〈레버〉(2019), 이미지 감독 제공

김보영 감독은 귀여운 캐릭터를 내세워 개인의 성장과 타인과의 관계, 사회의 풍경을 유쾌하고 오싹하게 표현한다. 캐릭터들은 치명적인 상황 속에서 고민을 거듭하고 몸부림치며 달려나간다. 이들의 고민은 일상 속에서 마무리되기도 하며 우리가 지나쳐 온 사회의 이면을 들춰내기도 한다. 때로는 밝고 때로는 어두운 이야기들을 통해 감독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무수한 선택과 질문을 함께 나눈다. 그의 작업은 삿포로 단편영화제(2015, 삿포로), 디아스포라영화제(2022, 인천), 인터필름 베를린(2022, 베를린)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했으며 KBS 독립영화관과 프랑스 ARTE TV 등 국내외 방송사에서 방영되었다.


전시는 김보영의 작업들 가운데 〈흉내〉(2013), 〈먹이〉(2016), 〈레버〉(2019)를 선보인다. 세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움직인다. 〈흉내〉에서 여자 주인공은 사랑하는 남자와 마주하려는 마음에 거짓 우연을 반복하다 어떤 존재가 되기로 결심한다. 〈먹이〉에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여정을 떠난 작은 물고기는 벽에 부딪히고, 〈레버〉에서 레버를 당기는 간단한 일로 돈을 벌던 남자는 은밀한 진실을 마주한다. 각자가 원하는 결말을 좇아 몸짓하는 순간 이들은 관계와 사회의 틈들을 발견하고 선택의 기로에 선다.



김승희

김승희, 〈심심〉(2017), 이미지 감독 제공

김승희 감독은 스톱 모션과 셀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몸짓을 조각내고 쌓아올리면서 마음과 관계의 다면적인 층들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에서 마음의 그릇이자 움직임을 표현하는 몸은 올록볼록한 유연함과 단단함으로 그려지며 여성 신체의 정형화된 묘사로부터 벗어난다. 《코끼리, 그림자, 바람》(2019, 경기도미술관, 안산)과 슬램댄스(2016/2018, 유타), DOK 라이프치히(2020, 라이프치히) 등 다수의 단체전과 영화제에 참여했다. 최근작 〈호랑이와 소〉(2019)는 AFI FEST 단편애니메이션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받아 미국 아카데미 어워즈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자격을 얻었으며, 뉴욕타임즈 Op-Docs 시리즈로 소장되었다. 


이번 전시는 김승희의 초기작 〈심경〉(2014)과 〈심심〉(2017)을 소개한다. 〈심경〉은 한 여성이 구멍 난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조각난 세계를 탐험하는 이야기다. 여성은 춤을 추고 외줄을 타며 추락하다가도 불을 토하고 날아오르며 마음의 파편들을 들여다본다. 결국 그녀가 관찰하는 마음은 조각나고 분열되었을지라도 여전히 고동치며, 여린 조각들이 한데 뭉쳐 밝게 빛나는 만화경처럼 아름답다. 〈심심〉은 〈심경〉에서 확장되어 마음과 마음이 마주치는 작품이다. 마음이 짓눌려 몸마저 으스러지는 상황에 놓이는 순간 혼자서 오롯이 맞설 수 없는 잔혹한 거대함에 두 존재가 함께 맞서 나간다. 심 心이라는, 마음을 뜻하는 글자가 들어간 두 작품에서 감독은 마음 속 매듭들을 풀어가는 과정을 드러내고 관람객들에게 연대와 위로를 전한다. 



우진

우진, 〈뷰티풀〉(2014), 이미지 감독 제공

우진 감독은 섬세한 선으로 대상의 몸짓에 담긴 욕망과 감정을 면밀하게 표현해낸다. 특히 신체가 뒤엉키고 분화되는 움직임을 통해 노동, 젠더, 가정 등 사회의 규범들을 돌아보게 한다. 개인전 《PLAY》(2013, 팔레 드 서울, 서울)와 《samulnori》(2014, Kaleidoscope, 베를린)을 열었다. 그의 작업은 한국퀴어영화제(2019, 서울), 애니마페스트 자그레브(2020, 자그레브), TOHorror 판타스틱 영화제 (2022, 토리노)에 초청되었으며 인디애니페스트(2014, 서울), 네덜란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2015, 위트레흐트) 등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우진은 초기 작업에서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을 변주하여, 머리 없이도 습관과 욕망을 기억하는 신체의 움직임들을 포착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감독의 초기작 중 〈플레이〉(2013)와 〈뷰티풀〉(2014), 〈산〉(2019)을 소개한다. 〈플레이〉가 노동자의 신체에 배인 몸짓을 추적하며 노동 구조를 관찰했다면, 〈뷰티풀〉은 다채로운 머리들을 획일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도시의 아름답고 완벽한 구조를 들춰낸다. 〈산〉에서는 고립된 가족이 폭력을 주고받는다. 고요한 산을 배경으로 강압적으로 먹이고 도망치려 자해하고 방관하며 기뻐하는 몸짓들이 공존하며 가족 사이에 피해와 가해가 교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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