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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음 수련

여름의 끝자락에서,
포도알 같은 나를 만지작거리며.

어떠한 모습이어도, 그런 너를 사랑해.

by 틔우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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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자꾸 느슨해지는 마음에 "정신 차리자. 다시 시작하자." 마음먹었더랬다. 나도 모르게 벌려놓은 일들, 이유 모르게 들뜬 마음을 표현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 들뜬 감정은 별론데?' 감정 억누르는 게 습관인 나에게 마음이 말했다. "그래, 너 요즘 들뜸이 너무 과하더라. 별로야. 자제해. 다시 조용히 침묵해."


오늘 인요가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지금은 백로예요.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잠시 멈추고, 나에게 남겨진 것들을 보는 시기예요. 계절이 삶을 바라보는 지혜를 알려줘요."


동작을 하다 멈추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감각의 변화를 느낀다. 저릿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조금만 움직여도 느낄 수 있는데, 왜 늘 양 끝을 오가려 했을까. 에너지를 다 쓸 때까지 하다 지쳐 멈추고, 마음을 다 꺼내어 표현하다 후회하며 멈추고. 늘 그런 식이었지.


그래서였을까. 나의 추구미는 늘 단단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사람. 난 너무 쉽게 흔들렸으니까. 그런데 얼마 전 누군가 나에게 그랬다. "안나 씨는 참 단단한 사람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바로 반박했다. "아니야. 저 사람이 널 잘 몰라서 그래. 너 엄청 흔들리잖아"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단단하다는 게 뭐지? 늘 평온해야만 하는 건가? 왜 들뜨면 안 될까? 왜 기뻐하면 안 될까? 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할까? 그냥 순수하게 기쁠 땐 기뻐하고, 슬플 땐 슬퍼하면 되는데. 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언제든 다시 중심으로 돌아오면 되는데 말이다.


어쩌면 단단한 중심, 즉 균형 잡힌 마음은 늘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쳤다가도 다시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이지 않을까 싶다.


다행히도, 이제는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나에 대한 신뢰'가 있다. 더 나아가고 싶은 마음, 언제 커지냐며 작은 포도알에 불평거리는 마음, 외부를 향해 계속 쫓아가는 시선들을 하나씩 놓아본다. 그리고 나에게로 다시 화살표를 돌린다.


백로니까, 선생님이 알려주신 계절의 지혜를 다시 연습해 본다.

더 이상 커지지 않는 포도알 같은 내 모습을 만지작거리며, 책의 글귀처럼 명랑하게 말해본다.

"괜찮아. 어떠한 모습이어도, 그런 너를 사랑해."


포도는 한없이 커질 수 없다. 포도 알은 한없이 늘어나서는 안 된다. 올해의 포도 줄기다 감당항 수 있을 만큼, 딱 그만큼 커진 후에는 바깥으로 부푸는 대신 안으로 여물기 시작해야만 한다. 열매가 달게 무르익는 것은 몸집이 커지지 않는 지금. 이때 열매의 맛이 결정된다. 열매가 알차게 익어가도록 기다리는 일, 날씨라는 우연에 온통 의지하는 일만이 남아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올해의 농사를 맡기는 지혜의 시간이다.
- 최예슬, <아주 오래되었으나 새로운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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